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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살인사건 피의자가 명문대 '의대생'이면 생기는 일[이승환의 노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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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이면 주목 받는 사회…고졸이면 '투명인간' 되는 세상

[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뉴스1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20대 남성 최 씨가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A 씨는 과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의대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4.5.8/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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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지난 6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건물 옥상에서 20대 남성이 동갑 여자친구를 살해했다는 보도는 사건 발생 다음 날인 7일 오전 10시 57분에 처음으로 나왔다.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다. 그러나 살인 사건이 매일 같이 보도되기 때문일까.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뉴스를 접하는 독자들도 웬만한 강력 사건엔 큰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러다 7일 오후 7시쯤 '피의자가 명문대학교 의대생'이라는 사실이 추가로 보도됐다. 피의자 최 씨가 수능 만점자라는 사실도 언론 보도로 확산했다. 사회에 파장이 일었고 여론은 술렁였다. 속보부터 후속 단독까지 의대생이란 단어를 앞세운 기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온라인 커뮤니티도 관련 글로 도배됐다. 의대생이 사건에 관련됐다는 점만으로 '매일 같이 발생하는 살인 사건 중 하나'에서 '전 국민이 주목하는 메가톤급 이슈'로 확대 재생산됐다.

◇한국 사회 단면 보여주는 '의대생'

한해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인 실종자 수(실종 신고 건 기준)는 6만 명 이상이다. 2021년 4월 25일 실종된 20대 청년은 '의대생' 손 모 씨였다. 온 국민이 마음을 졸이며 손 씨의 무사 귀환을 염원했다. 그러나 그는 실종 닷새 만에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타살이 아닌 사고사였다. 그런데도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고위 공직자가 사건에 개입됐다는 음모론까지 판을 쳤다.

기자협회에 따르면 그해 4월 28일부터 5월 10일까지 13일간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올라온 손 씨 관련 뉴스는 2458건에 달했다. 비슷한 시기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의대생 손 씨를 언급하는 게시물이 거의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손 씨가 실종되기 사흘 전 평택항 부두에서는 지방대 3학년 학생 이선호 씨가 산업재해로 숨졌다. 사고 후 보름간 이선호 씨 사건을 보도한 매체는 지역 언론사 두 곳뿐이었다.

올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단어도 '의대생'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의과대학의 정원을 2000명 증원하기로 했다. 그러자 전공의들은 반발하며 사직서를 냈고 '의대생'들은 집단으로 휴직계를 냈다. 휴학계를 낸 의대생은 1만 1000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포털이나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 검색창에 '의대생'을 입력하면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게시물이 뜬다. 요즘 누굴 만나도, 대화 주제는 '의대'이다. 의대 증원과 관련한 입장 또는 정책에 따라 정부와 정당의 지지율에 뚜렷한 변화가 생긴다.

대학에 입학하면 이미 '의대생들만의 리그'가 형성된다는 지적은 꾸준히 나왔다. 이들이 졸업한 후 개원하거나 종합병원에서 근무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 리그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실감하게 해준다. 국세청 종합소득세 신고분 자료에 따르면 의사·한의사·치과의사 등 의료업 종사자의 평균소득은 2021년 기준 2억 6900만 원이다. 해당 집계를 시작한 2014년보다 55.5% 증가했다. 고소득 직업인 변호사의 소득 증가율보다 약 4배 높다.

의대생이 여자 친구를 살해했을 때 사람들은 분노하면서도 "창창한 미래가 있는데 왜 그런 짓을 벌였느냐"며 의아해했다. 실종된 의대생이 한강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을 때는 "앞날이 창창한데 너무나 안타깝다"고 슬퍼했다. 정부의 의료 개혁 방안을 비난하며 의대생들이 집단 사직을 하자 사람들은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 시스템의 미래가 흔들릴까 봐 걱정했다. 의대생이란 단어 없이는 2024년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다.

◇"'대학도 가지 못한 실패자'"

의대생과 반대편에 있는 개념은 '저학력자'이다. 미래의 소득 수준도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고졸 이하 중 소득 상위 25%의 평균 연봉은 4000만 원 정도다. '소득 상위 25%'의 고졸 이하 연봉인데도 의사 평균 소득의 6분의 1에 미치지 못한다. '계층이 세습될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이런 현상이 분석되기도 한다. 조귀동 작가가 쓴 저서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는 "지방대생과 고졸자는 근로빈곤층(일은 하지만 소득이 워낙 낮아 가난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주공급원이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지방대생과 고졸자들은 20대 집단 내에서도 '주변부'를 형성한다…(중략)…지방의 20대가 지리적인 주변부에 그치지 않고 졸업을 전후해 사회 계층의 위계에서 주변부가 된다면, 일반계 고졸 20대는 '대학도 가지 못한' 실패자로 간주되며 투명인간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세습 중산층 사회, 96쪽)

의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목받고 특종이 되는 세상에서 '투명인간'이 된 20대 청년들은 지금 어떤 미래를 계획하고 있을까. 누구나 알 것이다. 이런 세상이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그리고 저학력자가 주목받을수록 '선진 사회'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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