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아무튼, 레터] 연극 연출가 임영웅을 기억하며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로 기억되는 이 연출가가 며칠 전 별세했다. 연극 속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50년이 넘도록 고도를 기다려 왔다. 고도는 나타나지 않고 그들은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자기 삶조차 통제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갇힌 현대인을 포착한 것이다.
인생은 온갖 기다림의 총합이다. 군사정권 시절에 고도는 민주화를 향한 기다림으로 해석됐고 누구에게는 신(神), 또 누구에게는 어둠 속 등불과 같았다. 살면서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나 믿음, 희망이 고도였다. 연극인에겐 ‘고도=관객’이기도 했다.
영정 사진 속 연출가는 웃고만 있었다. 배우 전무송·박정자·손숙·윤석화 등과 작업한 그는 생전에 “연출가와 배우는 서로 의지하는 관계”라고 말했다. “누가 누구 위에 있는 게 아닙니다. 같이 오래 한 배우일수록 그런 믿음이 생겨요. 뭘 잘하고 뭐가 부족한지 속속들이 알게 되지요.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며 서로 발전하는 거예요.”
배우, 극작가, 연출가 등 후배들이 밤늦도록 빈소를 지켰다. 고인과 서로 믿고 의지하며 성숙해진 관계였을 것이다. 임영웅씨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아한 대사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포조의 “(누구에게나) 격려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였다. 연극인들에게 임영웅씨는 존재만으로 격려가 되는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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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고도를 기다리며'에 바람 소리(음향 효과)를 넣으면 고독감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고 한 배우가 제안한 적이 있다. 그때 임영웅은 말했다. "너희가 연기를 잘하면 관객은 저절로 바람 소리를 듣는다." |
연극은 날마다 달라지는 시간 예술이다. 그때 그곳에 앉아 있지 않으면 흘러가 버린다. 미술은 어제 보나 오늘 보나 내일 보나 똑같다. 영화도 매한가지다. 그러나 연극은 오늘도 덧없이 사라진다. 인생을 닮은 예술이라 그 장르가 좋았다. 이제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볼 순 없을 것이다.
어떤 연극이 좋다면 반드시 희곡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희곡도 연출가와 배우가 망쳐버릴 수 있다. 좋은 음식이라면 반드시 재료가 좋지만, 재료가 좋다고 꼭 좋은 음식이 되진 않는다는 뜻이다. 임영웅씨는 재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기용한 연출가, 기울어진 몸으로도 반듯한 연극을 만든 거장이었다. 그를 떠나 보낸 밤에 비스듬하게 멈춰 있던 그 괘종시계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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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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