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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민정’의 칼끝이 김건희를 겨눌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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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김성재 신임 민정수석에게 임명장을 준 뒤 이렇게 말했다. “내가 김 수석에게 다른 건 부탁할 게 없고, 우리 아들들과 친인척,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관리를 잘 해주시오.” 민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 심장부의 감시다. 이왕 ‘민정’이란 칼을 꺼냈으면, 언제든 칼끝이 김건희 여사를 겨눌 수 있다는 믿음을 국민에게 줘야 한다. 그게 윤석열 대통령이 사는 길이다.





한겨레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새로 민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된 김주현 전 법무부 차관을 소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민심 청취 기능이 너무 취약해서” 민정수석실을 부활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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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ㅣ 대기자




김대중 대통령은 아마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정수석을 없앨 때나, 부활할 때나 그 근거를 김대중 대통령에게서 찾았다. 대선 승리 직후인 2022년 3월14일 윤 대통령은 서울 통의동 집무실에 첫 출근하면서 민정수석 폐지를 선언했다.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세평 검증을 위장해 정적이나 정치적 반대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명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를 김대중 대통령의 사직동팀 해체에 견준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번에 민정수석 부활을 발표하면서 다시 김 대통령을 언급했다. “민심 청취 기능이 너무 취약한 것”이 부활의 이유고 “과거 김대중 대통령도 취임 2년 만에 민정수석실을 복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핵심 조직을 없앴다가 복원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자세와 인식은 둘이 전혀 다르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윤석열은 김대중의 고민과 결정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초에 ‘사직동팀을 폐지하라’는 거센 여론에도 이 조직을 그대로 뒀다. 불법 사찰의 상징인 사직동팀은 디제이(DJ)가 야당 총재이던 시절 그의 계좌를 샅샅이 뒤진 적도 있다. “사직동팀 문제가 크지만 대통령 친인척과 고위공직자 비리를 감시하는 나름의 순기능은 있다고 봤기에 김 대통령은 천천히 존폐를 검토하기로 했다”고 박선숙 전 청와대 공보수석은 밝혔다. 그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민정수석실 폐지는 ‘대통령실 용산 이전’만큼이나 졸속이고 감정적이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감시’라는 핵심 기능엔 주목하지 않았다. 오직 ‘검찰총장을 핍박하고 간섭하는 음습한 조직’이란 식으로, 조국 전 민정수석에 대한 분노만 앞섰을 것이다.



비서관으로 급을 낮춘 민정수석 직위를 2년 만에 복원한 디제이의 결정도 윤 대통령은 아전인수로 해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민정수석 직위를 부활한 건 ‘민심 청취 기능의 추락’과는 관련이 없다.



1998년 옷 로비 의혹 사건이 발생하자 김 대통령은 ‘권력 내부의 비리나 논란을 막기 위해서’ 민정수석을 부활했다. 그리고 사직동팀은 해체했다. 새로 민정수석에 임명된 김성재 한신대 교수는 임명장을 받은 다음 날 청와대 관저에서 김 대통령과 조찬을 함께하며 이런 당부를 들었다고 말했다. “내가 김 수석에게 다른 건 부탁할 게 없고, 우리 아들들과 친인척,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관리를 잘 해주시오.”



디제이의 사직동팀이나 민정수석실 존폐 고민의 중심엔 항상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등 권력 핵심부의 비리나 월권, 권한 남용의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민정수석실 부활 발표에선 가장 중요한 이 부분이 빠져 있다. 많은 국민이 우려하는 김건희 여사는 ‘언터쳐블’처럼 보인다. ‘민정’을 다루는 김대중과 윤석열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서 난다.



‘민심 청취’를 위해 대선 공약을 뒤집는 건 설득력이 약하지만 그것 역시 걱정스럽긴 매한가지다. 민심 청취는 곧 정보 수집과 직결된다. 대통령이 여기에 집중하면, 대통령만 바라보는 조직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정보 수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의 민간인 사찰 사건은 단적인 사례다. 대통령실의 민정 기능을 항응고제인 ‘와파린’에 비유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덜 쓰면 혈관이 막히고, 과용하면 혈액이 묽어져 작은 상처에도 과다 출혈로 이어진다. 경계선을 잘 지켜야 하는데, 윤 대통령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즉흥적인 리더 밑에서 그 선을 지키기란 쉽지가 않다.



깊은 고민 없이 민정수석실을 없앴다가 총선에서 참패하고 정치·사법적 위기가 다가오자 조직을 부활하는 현 정권의 모습에서, ‘균형과 절제’를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윤 대통령의 민정수석실 부활이 몹시 위태롭게 보이는 이유다. 통치 효율성과 정확한 상황 판단을 위해 민정 기능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최고 권력자 개인의 욕구를 반영하는 순간 야누스적 속성을 띠는 건 한순간이다.



윤 대통령은 최근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2년은 ‘정치’를 하지 않고 제왕처럼 ‘군림’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이왕 ‘민정’이란 칼을 꺼냈으면, 외부로 겨눠 정보 수집이나 사정기관 통제에 힘을 쏟기보다는 권력 안으로 날을 세우길 바란다. 언제든 칼끝이 김건희 여사를 겨눌 수 있다는 믿음을 줄 때 국민은 수긍할 것이다. 그게 윤석열 대통령이 사는 길이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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