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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서울 학생인권조례 일방 폐지…민주주의 교육 퇴행시킨 폭거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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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울시의회 ‘제4차 인권·권익향상 특별위원회’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의 본회의 상정을 의결한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학생인권법과 청소년 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 전국행동’ 활동가 등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학생인권조례 폐지 시도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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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수 | 12월연구소 대표·한국교원대 교수(왼쪽사진)



이봉수 | 12월연구소 운영위원·덕성여고 교사





지난 4월26일 서울시의회가 학생인권 조례를 전격 폐지하였다. 이는 12년 동안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존중하는 학교 문화 발전에 기울인 노력을 무위로 돌려버린 제도적 폭거다. 우리는 국민의힘 의원이 다수인 서울시의회가 정확한 근거 제시 없이, 그리고 정책 이해관계자들과의 충실한 숙의 과정을 결여한 채 일방적으로 조례 폐지를 단행한 것에 분노한다.



이번 조례 폐지의 핵심 논거는 교권 침해 주장이다. 그러나 서울 서이초 사태 이후 전개된 공적 논쟁을 통하여 학생 인권 대 교권의 이분법적, 대결적 접근 구도는 허구적이며 해결책으로서도 실효성이 없다는 결론이 이미 내려지지 않았던가? 또한 조례를 제정한 시·도와 그렇지 않은 시·도에서 보고한 교권 침해 사례 수와 흐름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결과들이 많다. 실제로 2013년 학생인권 조례를 제정한 전라북도에서는 조례 제정 이후 교권 침해 건수가 오히려 감소했다. 면밀하게 토론한 뒤 합당한 정책 판단에 이르러야 할 사안에 대해 일방향의 결론을 정한 뒤 앵무새처럼 몇몇 논거만을 되뇌며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관행은 딱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특히, 조례 폐지 과정에서 서울시의회는 교육청, 시민사회, 학생 및 청소년단체 등 정책 이해관계자들과 충실한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변칙적으로 안건을 상정한 뒤 4월26일 인권·권익향상특별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속전속결로 처리해버렸다. 특별위원회 회의는 폐지 조례안 상정, 토론, 의결까지 고작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본회의 역시 안건 제출로부터 폐지 조례안 가결 선포까지 고작 3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안 설명에 이어 반대토론, 찬성토론 각 1회가 고작이었고 바로 표결에 부쳤다. 배석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의견 표명조차 허용하지 않았다(서울시의회 회의록).



이처럼 사회적 갈등과 논쟁이 첨예한 사안을 다룸에 있어 지역 대의 민주주의의 중심 기구인 시의회가 다양한 관점과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과 구성원들과 협의하지 않고, 실질적인 심의와 토론 절차를 밟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갈등과 의견 차이를 적절히 대표·중재하기는커녕 증폭시키는 시의회, 정당, 의원들을 우리는 민주주의 시민공동체의 정치적 대표라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도가 정착하면서 한 걸음씩 진전한 학교 인권 상황을 채 1시간의 토론조차 허용하지 않고 무참하게 후퇴시켜도 되는 것인가?



결국 이번 사태는 다시 한 번 한국의 민주주의, 교육, 시민성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하고 위태로운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를 뼈아프게 드러낸다.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는 대화, 설득, 협상, 양보, 타협, 토론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최소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규범으로 해서 살아나간다. 그러나 갈수록 심화하는 승자독식 민주주의의 폐해 속에 교육 영역마저 황폐화하고 있다. 합의가 실종된 진영 정치 속에서 교육은 승자의 전리품이 되어버렸다. 집권당이 바뀔 때마다 교육은 집권 세력의 가치와 신념 실현의 장이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교육 시스템 도입, 수시와 정시 비율 변화, 잦은 수능 제도 및 고교학점제 변경 등은 교육 현장의 고통을 가중시켜왔다. 학생인권 조례 폐지 결정도 그 연장선의 제도적 폭력이 아닌지 답해야 한다.



학생인권 조례의 모태는 아이들과 유태인 수용소 가스실에서 함께 한 교육자 야누스 코르착의 아동권리 선언이다. 유엔은 1989년 아동권리협약(CRC)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현재 이 협약은 대한민국을 비롯해 가장 많은 국가가 가입한 국제인권조약이다. 학생인권 조례는 이에 기반한 것으로 대단히 특별한 내용이 아니라 아동, 청소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적 인권에 대한 선언적 내용을 담고 있다. 단지 내일의 시민이 아니라 ‘오늘의 시민’으로서 모든 아동, 청소년의 인권은 온전히 보호, 증진, 실현되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충실한 검토와 민주적 숙의를 통해 개선해가야지 무작정 폐지부터 하고 보는 식의 정책 결정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무책임하고 독선적인 방식의 학생인권 조례 폐지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폐지한 학생인권 조례는 새로운 민주주의와 시민성 차원에서 더 실효성 있고 진취적인 내용과 형태로 복원, 재구성해야 한다.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이 교육 제도와 정책의 잦은 변경은 한국 민주주의와 정책 결정 시스템의 중대한 결함을 보여준다. 시민적 참여와 숙의, 그리고 미래지향적 합의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주의와 교육 체제의 수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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