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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이슈 예비타당성조사 대상 사업 선정

대형R&D 예타 족쇄 푼다 … AI반도체·차세대 배터리 속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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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D 예타 폐지 추진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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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2013년 사업비 1500억원 규모로 자율주행 차량 핵심부품 연구개발(R&D) 사업을 선제적으로 전개하며 예비타당성조사(예타)에 들어갔다. 하지만 경제성을 비롯한 이유로 예타에서 떨어진 후 다시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해당 프로젝트는 2017년에야 첫 삽을 떴다.

4년가량 지체되면서 국가 R&D를 통해 개발한 핵심부품 가운데 실제 차량에 적용된 비중은 절반이 채 되지 못했다. 다음 단계의 고도화한 자율주행 R&D도 순차적으로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예타에 발목을 잡힌 사이 자율주행 기술 확보가 늦어졌고, 글로벌 자율주행 부품, 소프트웨어 개발 경쟁에서 한국이 상당히 뒤처지게 됐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R&D 사업 평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다. 시장을 선점하고 주도하려면 적시성과 적절한 예산 투자는 필수"라며 "경제성 분석만 하다 보면 사업비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 결국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사업성 없는 기술만 나오게 된다"고 지적했다.

28일 정부가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 국가 R&D 예타 면제를 추진하기로 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예타 과정을 줄여 소규모, 단기 R&D 사업이 남발되는 것을 막고 글로벌 첨단기술 경쟁에서 시의성 있는 기술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현재 R&D 예타 전면 폐지에 대해 재정 여건을 비롯한 여러 대안을 놓고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로·항만·철도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SOC)에 대한 예타는 주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담당하지만, R&D 예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맡아 진행하고 있다. R&D 예타 조사기간은 통상 9개월이 걸리는 SOC보다 2개월 짧은 7개월이다.

하지만 과기계에서는 속도가 생명인 R&D 특성상 7개월도 지나치게 길다고 보고 있다. R&D 예타가 폐지되면 연평균 9조원에 육박하는 국가 R&D 사업에 한층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KISTEP에 따르면 R&D 예타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예타 대상에 오른 국가 R&D 사업은 275건이며 총사업비는 158조5000억원에 달했다. 사업당 평균 사업비는 8조9000억원이다.

양자과학과 인공지능(AI) 반도체를 활용한 클라우드 기술 개발, 한국형 도심항공교통(UAM) 운용 체계와 친환경 모빌리티용 고성능 차세대 배터리 기술 확보 등 차세대 산업 먹거리가 될 프로젝트가 대거 담겼다.

기획재정부는 예타 개선과 함께 올해 R&D 예산을 대폭 증액한다는 방침이다. 지난해 정부는 16.6% 대폭 삭감해 올해 R&D 예산(25조9000억원)을 편성했는데, 과기계 반발로 국회 심사 과정에서 예산이 26조5000억원까지 늘었다. 내년도 R&D 예산은 상한선 없이 증액돼 30조원을 넘어설 것이 유력하다. R&D 예산은 민간 부문만으로는 투자하기 힘든 기초연구와 AI, 첨단바이오, 양자 등 이른바 3대 '게임 체인저' 기술에 집중 투입한다.

향후 관건은 R&D 예타 면제에 따라 재정 건전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점이다. 2008~2023년 R&D 예타를 통해 절감한 사업비는 98조9000억원에 달한다. 당초 개별 부처가 요구한 사업비는 152조6000억원에 달했지만 예타를 통해 53조7000억원이 조정됐다. 예타가 폐지되거나 단축되면 사업비 절감 효과가 그만큼 줄어들 공산이 크다. 이에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부처별로 지출 한도가 있기 때문에 이 한도 내에서 사업 규모를 조절해 예산을 편성하면 된다"며 "R&D 예타를 폐지해도 재정에 대한 우려는 커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타 면제는 법 개정이 필요한 입법 과제라는 점도 변수다. 지난해 여야는 SOC와 R&D 예타 대상이 되는 기준금액을 총사업비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올리는 내용으로 국가재정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재정 건전성에 역행한다는 여론 비판에 개정 작업이 중단된 상태다.

올해 정부 총지출(656조6000억원)에 국세 감면액 전망치(77조1000억원)를 합친 전체 국가지출은 733조7000억원으로, 역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늘었다. 저출생·고령화 예산 급증에 정부가 법령상 지출해야만 하는 의무지출이 눈덩이처럼 늘고 있는데, 원래대로라면 받아야 할 세금을 받지 않는 조세지출까지 급격히 증가한 것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단 정부는 부처 사업의 타당성을 모두 재점검해 우선순위가 낮고 성과가 미흡한 사업은 과감히 삭감하거나 폐지하기로 했다. 유사·중복 사업은 정리하고, 여윳돈이 있는 기금에서 재원이 부족한 기금으로 자금을 옮겨 보다 효율적으로 재정 관리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또 건전 재정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내년 예산에서 재량 지출을 10% 이상 감축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야권에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과 국채 발행 등을 통해 총선 공약 재원을 마련한다는 방침이어서 재정 운용 압박은 더 커질 전망이다.

[김정환 기자 / 문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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