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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1 (금)

“군산항서 실린 쌀, 한국이 아프리카에 주는 희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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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세계식량계획 사무차장보 인터뷰

일제강점기 미곡 수탈하던 군산항

이제는 한국의 국제사회 공헌의 상징으로

”어려울 때 나서준 한국에게 감사”

전북 군산항은 근대사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전북 지역 평야에서 나는 미곡을 수탈하기 위해 개항시킨 항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곳에서 지난 17일 쌀이 배에 실렸다. 이번엔 우리 쌀을 빼앗기는 수탈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긴급하게 돕기 위해 배에 실은 것이다. 이날 군산에서 선적돼 다음달 출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올해 총 10만t의 쌀이 울산·목포·부산신항 등을 통해 열 한 개 나라에 지원된다.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마다가스카르·모리타니·모잠비크·시에라리온·우간다·에티오피아·케냐, 그리고 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 중동의 예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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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쌀이 해외원조용으로 선적되는 군산항 현장에 나온 라니아 다가시-카마라 유엔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보./세계식량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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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쌀이 배에 실리는 광경을 누구보다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외국인이 있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함께 이번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라니아 다가시-카마라(50)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사무차장보다. 그의 고국은 아프리카 수단이다. 정치불안·내전·난민 등 아프리카에 만연한 위기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나라 중의 하나다. 특히 30년 전 굶주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소녀를 먼 발치에서 맹금류가 빤히 쳐다보는 장면을 프레임에 담은 사진 ‘대머리수리와 어린 소녀’로 전세계에 깊이 각인됐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사진이 촬영된 지역은 현재는 2011년 분리·독립한 남수단 영토다.)

선적 행사를 마무리한 이튿날 본지와 만난 다가시-카마라 사무차장보는 “군산항에 꼭 가고 싶었는데 뜻한 바를 이뤄 뜻깊다”고 말했다. “저 자신부터 식량과 개발 지원을 받는 나라에서 자라났잖아요. (이번 한국 방문은) 개인적으로 영감을 얻고 희망을 얻는 계기였어요.” 이번 출항식이 첫 행사는 아니지만 지난해보다 쌀 선적량이 갑절이 됐다는 의미가 있다. 다가시-카마라 사무차장보는 한국이 한 때 식량을 지원받는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됐다는 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나의 나라 수단은 분쟁과 폭력 등 아픔을 겪고 있지만, 기적과 미래가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한국이 증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 감정이 북받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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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아 다가시-카마라 유엔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보가 지난 17일 대외원조용 쌀이 선적된 배 앞에서 환하게 미소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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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시-카마라 사무차장보는 2000년에 WFP에 합류했다. 무급 인턴으로 시작해 분쟁·기아 창궐지역을 중점적으로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으며 고위직에 올랐다. 1956년 독립한 수단은 쿠데타와 내전 등의 정정 불안 상황을 겪고,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한 오마르 알 바시르 정권의 30년 철권통치기를 겪었다. 2019년 알 사비르가 축출된 뒤에는 시민사회와 야권도 참여하는 과도정부가 구성돼 민주화와 정치 안정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지만 이마저도 쿠데타로 무너지고 정부군과 반군의 무장투쟁이 1년째 이어지고 있다. 다카시-카마라 사무차장보는 “아버지는 정부에 비판적인 유력 언론인이었고, 어머니는 진보적인 여권 운동가였다”며 “어린시절에는 우리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WFP에 들어온 뒤 분쟁·기아 지역의 현장에서 활동해오며 굶주림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게 됐다. “기근이 닥쳐온 소말리아에서는 아이와 엄마가 눈앞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을 지켜봐야했어요. 2011년 내전이 발생한 시리아에서는 영양부족으로 너무나 말라서 아이를 가졌다는 걸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임신부도 있었어요. 무사히 아이를 낳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분쟁이 벌어지면 그 충격은 고스란히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 받게 돼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그에게 용기를 복돋워주는 것은 “자기 나라의 고난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는, 해당 국가에서 채용된 직원들의 헌신”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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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아 다가시-카마라 유엔세계식량계획 사무차장보(오른쪽)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가운데)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쌀 10만t 원조 출항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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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과의 협업은 종종 슬픈 이별로 이어지곤 한다. “2003년 이라크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우리는 현지 구호 요원을 놔두고 빠져나와야 했어요. 이별하고 오는 차안에서 직원들은 눈물을 쏟아내고 말을 잃었지요.” 긴급한 구호 활동 중에서도 시련을 이겨내는 주민들의 분투를 보는 것은 큰 보람이라고 했다. “2005~2006년 강진으로 초토화돼서 완전히 평평해진 마을로 긴급 식량구호를 갔을 때, 고난에 굴하지 않고 마음을 모아 삶의 터전을 재건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다가시-카마라 사무차장보는 한국이 올해부터 식량원조 규모를 종전의 두 배로 늘린 것에 대해서 “전세계가 가장 배고파하는 이 시점에 국제사회에서 앞장서겠다는 결정”이라며 “다른 잘 사는 나라들이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할 때 이런 결정 내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또 가나·감비아·세네갈·기니·카메룬·우간다 등 아프리카 6개국에서 우수한 벼종자를 생산할 수 있도록 기술을 전수하는 ‘K 라이스벨트’ 사업을 언급하면서 “이 지역에 농업개선 효과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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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이 지난 5일 가나 다웨냐에 있는 ‘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코피아·KOPIA)’ 가나센터에서 '2023년 라이스피아' 사업을 통해 처음 생산한 벼 종자를 가나 정부에 전달했다./농촌진흥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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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현재 여의치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히 털어놓았다. “우리는 시리아에서 아주 어려운 결정을 해야했어요. 긴급 식량구호 대상자를 600만명에서 100만명으로 줄여야했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1000만명을 돌보는게 어렵게 됐습니다. 배고픔은 커져가고 있는데 이들을 도울 돈이 떨어져가고 있어요. 현재 확보된 예산은 긴급한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의 10분의 1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한국에서 더욱 따뜻한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수단은 전 인구의 97%가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다. 다가시-카마라 사무총장보 역시 무슬림이다. 이달 중순에 치른 이슬람권 국가의 최대 명절 이드 알 피트르(라마단의 성공적 마무리를 축하하는 날)때는 아들과 조카들의 이름으로 기근·분쟁 지역의 어린이 구호 식량 기금을 기부했다. 이번 라마단 기간 간절히 빌었던 소원을 물으니 간결하고 분명하게 답했다. ‘평화’.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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