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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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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노력형 천재란?' 세한도·추사체 만든 김정희 보면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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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표현 중 '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이라는 말이 있어요. 문학·회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다재다능한 사람을 이르는 표현인데요. 르네상스 시기 회화·음악·화학·천문학·건축학·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다양한 활동을 펼친 이탈리아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르네상스 맨의 좋은 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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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박물관을 돌아본 추승찬(왼쪽)·이유민 학생기자가 바로 옆 과지초당을 찾았다. 과지초당은 김정희가 말년에 머물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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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다방면에서 보인 재능을 통해 후대까지 이름이 전하는 천재가 있답니다. 바로 조선 후기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예요. 이유민·추승찬 학생기자가 김정희의 생애와 업적을 알아보기 위해 경기도 과천시 추사로에 있는 추사박물관을 찾았어요. 과천은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이죠. 윤재하 학예연구사가 2층 추사의 생애 전시실에서 이들을 맞이했어요.

김정희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인 경주 김씨 가문에서 1786년(정조 10년) 태어났어요. 이후 아들이 없었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출계했죠. 아버지(생부)인 김노경은 예조·병조판서 등 요직에 등용됐고, 글씨를 잘 썼는데요. 아들인 김정희도 어릴 때부터 글씨·그림을 잘하는 것을 기본 덕목으로 삼아 열심히 연습했죠. 그가 금석학·고증학 등에 통달했다는 윤 학예사의 설명을 듣던 승찬 학생기자가 "고증학·금석학이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고증학이란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이상향이 아니라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에요. 고증학의 한 줄기로 나온 학문이 금석학으로, 실제 돌이나 쇠붙이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를 연구합니다."

그는 1809년 청나라 연경(지금의 중국 북경)에 방문하면서 고증학·금석학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실학자 박제가의 제자였던 김정희는 스승의 영향으로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배우고 싶어했죠. 마침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지금의 중국 북경)에 가게 돼 김정희도 자제군관(연수생)의 자격으로 함께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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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하 학예사(맨 오른쪽)가 소중 학생기자단에 김정희의 일생과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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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연경에서 40여 일 머물며 새로운 문물을 살피고, 여러 학자를 만났습니다. 특히 청대 고증학의 대가인 옹방강(1733~1818)과 완원(1764~1849)를 만나 직접 고증학을 배웠죠. 당시 청나라는 조선을 한 수 아래 나라로 여겼기에 조선사람 김정희가 대학자 옹방강의 제자가 됐다는 소식은 연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어요. 추사박물관에는 김정희가 옹방강을 만났을 때 나눈 필담서가 전시돼 있죠. "조선과 청나라는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어요. 하지만 한자를 쓴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글자로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했죠." 또 연경을 떠나는 추사를 위해 청나라 학자들이 모인 송별모임 장면이 담긴 '증추사동귀시권'도 봤는데요. 인물 중 유일하게 갓을 쓴 사람이 추사예요. 당시 추사가 연경에서 짧은 기간 머물렀지만 청나라 학계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느낄 수 있었죠.

조선으로 돌아온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배운 금석문 감식법과 서법 등을 적용해 중요한 업적을 남깁니다. 바로 친구 김경연·조인영과 함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조사한 것이죠. 이 비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국토를 크게 넓힌 뒤 곳곳을 순시할 때 북한산에 세운 겁니다. 윤 학예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모형 앞으로 이끌었죠. 비석 측면에는 "이것은 신라진흥대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찾아와 읽다. 경축년(1817)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찾아와 남아있는 68자를 살펴 판독하다"라는 내용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어요. 북한산진흥왕 순수비의 발견과 비문 해독은 비석이 세워진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혔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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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발견기 탁본. 김정희는 금석학을 통해 중요한 역사적 발견도 했다. ⓒ추사박물관


금석학과 관련된 김정희의 대표적 업적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살펴봤으니 이제 그가 남긴 그림에 대해 알아볼까요. 1819년 과거시험에 급제한 김정희는 요직을 맡으며 출셋길에 오릅니다. 하지만 1840년 정쟁에 휘말리면서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성에 위리안치됐죠. 위리안치(圍離安置)는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형벌이에요.

김정희가 남긴 서화의 대표작인 '세한도'가 탄생한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벼슬길에 올라 탄탄대로를 걷던 김정희는 가시울타리 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며 찾아오는 이도 없는 생활에서 많은 외로움을 느꼈죠. 이때 역관이었던 그의 제자 이상적이 청나라에 갔을 때 김정희가 보고 싶어했던 여러 서적을 구했고,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와서 가져다줬어요.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려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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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 나오는 구절인 '세한'을 인용한 '세한도'를 보면 유배생활 중이던 김정희의 심경이 잘 드러난다. ⓒ추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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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의 특성과 가치를 알면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를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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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에서 '세한도' 모본을 살피던 유민 학생기자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세한도'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라고 궁금해했죠. "‘세한’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추운 겨울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이에요. 이 그림을 국보이자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뽑는 이유는 첫째로 작품의 제목, 작가의 이름,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당시 김정희는 외로움, 한양보다 불편한 생활, 여러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힘든 유배생활을 하며 제자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하루하루 버티던 상황이었죠. '세한도'는 메마른 붓질로 (당시 김정희의 상태를 반영한)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논어』의 나오는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문인화라는 점에서 명작이라 할 수 있어요."

'세한도'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인화라는 개념을 함께 알아야 해요. 흔히 그림 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풍경·인물을 화폭에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문인화는 화가처럼 그림 그리기를 직업으로 하지 않는 선비·사대부들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겁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 혹은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絶)'이라고 해서 좋은 시를 짓고 멋진 글씨를 쓰고 마음을 표현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모두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여겼어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 바로 문인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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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가 창안한 추사체는 그가 열 개의 벼루와 천 개의 붓을 닳게 했다고 말했을 만큼 큰 노력 끝에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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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는 고고한 선비 정신과 곧은 절개 표현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그리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담아 표현했어요. 그래서 문인화를 감상하려면 그림에 표현된 대상의 형태보다는 거기에 숨어있는 그린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김정희가 과천에 머물면서 그렸다고 전해지는 '불이선란도'는 실제 난초를 그린 것이 아니지만, 그가 오랜 수련을 통해 구현한 문인화의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 보물로 지정됐어요.

김정희 하면 바로 떠오르는 키워드 중 하나는 그가 완성한 글씨체인 추사체죠. 김정희의 글씨체는 그의 생애를 통틀어 여러 번 변화했는데, 제주 유배생활을 기점으로 독창적이며 뛰어난 구성미를 갖춘 글씨체로 진화합니다. 전시실에는 '촌노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김정희의 서예 작품이 전시돼 있었어요. '좋은 반찬은 두부·오이·생강·채소이며,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손자라'라는 뜻으로 김정희가 말년에 4년간 과천에 머무르면서 깨달은 인생의 진리를 쓴 거죠. 굳세고 힘찬 붓놀림으로 써 내려 간, 굵기 차이가 심한 각진 글씨체가 추사체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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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와 더불어 추사의 대표작인 '불이선란도'는 그의 시서화일치를 잘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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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를 보며 따라 쓰는 것이 대표적인 글씨 공부방법이었어요.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조선사람 중 왕희지의 글씨를 가장 잘 썼다는 한석봉의 글씨를 보면서 많이 연습했었죠. 김정희도 어렸을 때는 왕희지·한석봉의 글씨를 보며 공부했어요. 그런데 24세에 청나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완원 선생을 만나면서 옛 비석에 남아있는 글씨가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앞서 설명한 금석학을 공부했고, 옛 글씨를 연구하고 연습하면서 추사체라는 글씨를 만들게 됐죠. 그동안 남들이 하지 않았던 새로운 글씨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명필로 인정받는 겁니다."

이렇듯 금석학·문인화·서예 등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던 김정희.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 아닌, 노력에 의한 결과물에 가까워요. 김정희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70여 년 동안 살면서 벼루 열 개에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을 만큼 연습했죠. 이를 통해 김정희가 금석학·문인화·서예 등 여러 분야에서 남긴 업적은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들에 의해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조선의 문인화·서예 등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고, 현재에도 김정희의 작품을 이용한 여러 디자인이 개발되고 있죠. 또한 유배생활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닦아 여러 업적을 남긴 김정희의 일생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답니다.

■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이번 취재에서는 과천에 있는 추사박물관에 방문, ‘김정희’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기도 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서화가이기도 하죠. 그가 그린 국보 제180호 ‘세한도’는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작품이지요. 비록 유배를 많이 다녔지만, 유배시기에도 글과 그림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았어요. 평생 벼루 10개에 구멍을 내고 붓 1000자루를 닳게 하였고, 죽기 3일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열정과 노력으로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추사체’를 이룩해 낸 것이 저에게는 많은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내가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분야를 찾아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의미 있는 취재였습니다.

이유민(서울 대모초 5) 학생기자

이번 취재는 경기도 과천에 있는 추사박물관에서 윤재하 학예연구사님과 함께했어요. 학예사님과 함께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추사 김정희의 생애와 그가 어떻게 추사체를 만들었는지 알게 돼 좋았습니다. 그리고 김정희가 청나라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에게 금석학을 배운 사실과, 이를 통해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 사실이 신기했어요.

추승찬(서울 역촌초 6) 학생기자

글=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이유민(서울 대모초 5)·추승찬(서울 역촌초 6)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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