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27 (토)

[인터뷰] 강제동원 양금덕의 분노·슬픔, 일본인 배우가 연기하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연극 ‘봉선화Ⅲ’에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씨의 역할을 맡은 무토 요코.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일본이 국가 정책으로 저지른 조선인 소녀 강제 연행은 전쟁 범죄라고 생각해요.”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한 연극 ‘봉선화Ⅲ’에서 조선여자근로정신대(근로정신대) 피해자 역할을 맡은 무토 요코(59)는 21일 한겨레와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이 조선의 소녀들을 노예로 취급했다”고 말했다. ‘봉선화Ⅲ’은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조선인 소녀들의 아픈 기억과 한·일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일본의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싸워온 이야기를 얼개로 삼고 있다. 일본 나고야 시민연극단은 오는 24일 오후 3시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 대공연장에서 ‘봉선화Ⅲ’을 공연한다.



한겨레

일본 나고야 시민연극단 단원들이 지난 20일 연극 ‘봉선화Ⅲ’ 연습을 하고 있다. 일제강제동운시민모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무토는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95·광주시 서구 양동)씨 역할을 맡았다. 양씨는 1944년 5월 전남 나주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에 가면 일을 하면서 여학교에 가게 해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말을 믿고 근로정신대에 지원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반대해 철회하려고 했다. 그러자 일본인 교장은 “지명을 받고도 일본에 가지 않으면 부모를 체포하겠다”고 협박했다. 겁이 덜컥 났던 양씨는 아버지 인감을 몰래 꺼내 담임교사에게 전달한 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갔다. 무토는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죽을 만큼 일했는데 단 한 푼도 못 받았다”는 양씨의 분노와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할 참이다.



한겨레

2010년 3월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철수를 요구하며 눈보라 속에서도 의연하게 1인시위를 하는 양금덕씨.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무토는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질곡 진 삶을 살았던 양씨의 인생도 무대에서 보여준다. “결혼해서도 남편의 폭력이 심했고, 몇 년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장에 가면 ‘몇 명의 남자를 상대했냐’라고 모욕을 당했다. 그때 흘린 눈물은 배를 한 척 띄우고도 남을 정도다.” 양씨의 아픔을 드러내는 이 대사가 무토의 가슴에 남았다.



무토는 나고야시 아이치현 고등학교 교직원 조합에서 일하는 직원이자 극단 메이게이 배우다. 그는 1993년 교직원 조합 집행위원장이던 다카하시 마코토(81)를 만나면서 근로정신대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 세계사 교사였던 다카하시는 1986년부터 나고야 항공기 공장에서 도난카이 대지진(1944년 12월7일) 때 죽은 조선인 소녀 6명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중이었다. 무토는 태평양전쟁 말기 13~15살 조선인 소녀 1700여명은 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돼 강제노동을 하고도 임금 한 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무토는 “내 딸이, 손녀가, 내가 그런 처사를 당했다면 어떻겠나?”라고 말했다.



한겨레

일제강점기 때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끌려가 일하고 있는 조선인 소녀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98년 일본 시민 1100여명이 참여해 꾸린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지원회)은 근로정신대 문제를 일본 사회에 제기하려고 연극 작품을 만들어 공연했다. 2003년 첫 작품 ‘봉선화’에선 무토는 양씨를 꾀어 일본 군수공장에 가게 했던 담임교사를 연기했다. 이 연극을 관람한 양씨는 공연 뒤풀이 때 일본인 헌병 역을 했던 배우와 담임교사 역을 한 그에게 “당신들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며 말을 건넸다. 무토는 최근 일본 잡지 ‘페민’과 한 인터뷰에서 “당시 헌병 역할을 한 배우는 바로 무릎을 꿇고 사과했지만, 난 ‘그저 연기한 것뿐인데…’하며 억울해했다”(페민 한국 제휴 ‘일다’ 1월21일 보도)고 고백했다.



한겨레

‘봉선화Ⅲ’ 연극 작품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나카 토시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무토는 ‘남자 배우는 (역사와) 마주했지만, 나는 도망쳤구나’하는 생각 때문에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2022년 ‘봉선화Ⅱ’를 공연한다는 말을 듣고 양금덕씨 역할을 자청했다. 양씨 등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1999년 일본 법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패소했다가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았다. 광주에선 일본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패소한 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현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이 생겼다.



‘봉선화Ⅲ’엔 일본인 배우와 시민 연기자 등 23명이 출연한다.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한 나카 토시오(74)도 배우로 참여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로 5·18유공자인 고 김혜옥씨의 사연도 작품 속에 들어있다. 일본 나고야 시민연극단은 오는 24일 오전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한다.



광주문화재단과 나고야 소송지원회,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지난해 9월 업무협약을 해 ‘봉선화Ⅲ’ 광주 공연의 밑돌을 놓았다. 24일 광주공연 500석은 이미 예약이 끝났다. 다카하시 나고야 소송지원회 대표는 “내년 2월 ‘봉선화Ⅲ’을 도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공연 장소를 섭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시민단체가 연대해 예술을 통해 근로정신대 인권침해 사실을 널리 알릴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한겨레의 벗이 되어주세요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