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2 (금)

이슈 게임정책과 업계 현황

대학서 게임중독 빠지는 이공계 영재들, 병원 홍보수단 전락한 ‘과학고’ 타이틀[이공계 엑소더스②]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현실을 보면 의대 갈 수밖에 없다”

회의감 빠지는 이공계 영재들

“부실한 영재 양성 체계가 의대 열풍 키워”

헤럴드경제

[123RF]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 인재 무게 추가 기울고 있다. 어느샌가 이공계는 ‘기피’의 대상이, 의약학계는 10년을 걸려서라도 가야만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의대 2000명 증원도 단기적으로는 이 현상에 기름을 부었다.

직업 선택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는 사회적 압력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초등학생부터 반도체 대기업 직원까지 입시 학원 문을 두드리게 만드는 한국은 지금 ‘의사’ 권하는 사회다.

“한국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국내 대학 이공계 학과 졸업 후 해외 IT 기업으로 떠난 한 청년의 말이다. 의대 열풍의 이면, 이공계 인재들을 떠나도록 만든 현실을 들여다봤다.

“[헤럴드경제=박혜원·안효정 기자] #.“기껏 영재교육을 받은 친구들이, 대학에 가선 학업 흥미를 잃고 게임 중독에 빠집니다. 기초교양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대학 교육 때문에요. 그러다 현실에 눈을 돌려, ‘차라리 의대나 가자’고 결심합니다.”(A 영재고등학교 관계자)

#.“이공계에서 활약할 몇십 년 뒤 미래를 같이 그리다가도, ‘너 그러다 공대 간다’ 같은 말을 농담처럼 하기도 해요. 이공계 대우가 좋지 않아 진학 자체에 회의적인 친구들도 많습니다. 선생님들이 대놓고 약대 진학을 권유하기도 하고요.”(B 과학고등학교 졸업생)

개인 적성과 무관한 의대 쏠림 현상이 심화하는 가운데, 청소년 시절부터 이공계 공부에 몰두해온 ‘영재’들의 이탈마저 계속되고 있다. 이공계 영재 육성 체계가 부실한 탓에 영재학교나 과학고를 졸업하고 이공계 대학에 진학했다 회의감에 빠져 뒤늦게 의대에 진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나아가 이들의 고등학교 출신 이력은 의사들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했다.

“이공계 영재들, 대학 가서 방치…‘차라리 의대’”
헤럴드경제

오성환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장 [서울과학고 제공]


의대 쏠림은 이공계 영재교육계에서 가장 크게 체감하는 문제다. 재학생들의 의대 진학뿐 아니라, 이공계에 진학한 졸업생들마저 뒤늦게 의대로 향하기도 한다. 오성환 서울과학고(영재학교) 교장은 “이공계 진학 후 대학 커리큘럼에 실망해 의대에 가거나, 재학 중 의대에 진학했다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유학을 가기도 한다”며 “사회적 자원 배분 실패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 교장은 “세금을 투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영재학교 아이들이 반드시 이공계에 가야만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면서도 “다만 이들의 적성을 제대로 찾아줄 수 있는 체계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공계 진로를 선택한 영재들이 정작 대학 진학 후 ‘방치’된다는 지적도 있다. 박춘성 한국영재교육학회장(상지대 미래라이프 대학 교수)는 “고등교육에서 지나치게 ‘평등교육’이 강조돼 영재 출신 아이들이 대학에 가선 오히려 범재 수준으로 떨어지는 부작용이 있다”며 “교수들의 일대일 매칭 등 영재성을 키울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학 측 반론도 있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로 이탈하며 전반적인 학력수준이 낮아진 상황에, 영재 출신 학생에 수업 난이도를 맞추기 어렵다는 ‘딜레마’다. 서울 소재 한 공과대 소속 한 교수는 “영재 학생들이 입학해 학업 흥미를 잃는 상황은 알고 있다”면서도 “의대 쏠림이 매년 심해지며 전반적으로 학생들의 수준이 하향 평준화하고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털어놨다.

“과학고 출신입니다” 의사 홍보수단 전락한 과학고

헤럴드경제

한 내과의원 홈페이지 캡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공계를 떠난 의사들의 영재교육기관 출신 이력은 홍보수단으로 전락했다. 일례로 수도권 소재 한 내과의원 원장은 홈페이지에 과학고 졸업 후 서울대 공과대학에 진학한 뒤, 인하대 의대에 재진학한 이력을 소개했다. 다른 지역 치과 소속 한 과장은 과학고를 조기 졸업 해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한 이력을 썼다.

이런 사이 학생들의 회의감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올해 C 과학고를 졸업해 과학기술원에 진학한 김모(18)양은 “의대에 보내준대도 가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제발 의대 가라’는 선배들의 말이 자꾸 들려와 고민이 된다”고 털어놨다.

과학영재교육을 연구한 이지원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공계 인재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좁은 취업시장에서 좌절한 후, 자격증을 받으면 평생이 보장되는 의대로 재진학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우려했다.

과학고 의대 진학 막자…“다 자사고 갔다”
헤럴드경제

다만 과학고 및 영재고 학생들의 의대 진학 자체는 올해는 줄어들 전망이다. 과학고 학생이 의약학 계열에 지원할 시 학교생활기록부 창의체험활동을 공란 처리하는 불이익 조치가 올해부터 적용되기 때문이다. 전국 영재학교 및 과학고가 2022년부터 의약학 계열에 지원한 학생들로부터 교육비와 장학금을 환수해온 조치에서 한층 강화된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의대 진학 수요가 여전하다는 정황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강남구 소재 한 재수종합학원 관계자는 “한 반에 절반은 과학고 출신이라고 보면 된다”고 단언했다. D 과학고 재학생 김모(18)양은 “의사가 된다면 포기한 장학금보다 더 큰 금전적 이득을 얻을 게 뻔한데 장학금 환수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고 했다.

“과학고 의대 진학 방지 조치가 강화된단 소문이 퍼진 후, 소위 외제차를 과학고에 끌고 오는 학부모가 확 줄었다. 그리고 그게 다 자사고로 갔다더라.” A 과학고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한때 사교육계에선 ‘의대 보내려면 과학고 먼저 보내라’는 말이 일종의 ‘팁’처럼 떠돌았다. 과학고에서 우수 교원들로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은 뒤 의대 진학을 하면 된다는 것. 그러나 장학금 환수 등 조치가 생기면서, 이런 학생들이 자사고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다.

의대 열풍은 계속…학원가 자사고 진학 늘고, 과학고 자퇴 늘어
헤럴드경제

[연합]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관련 통계를 보면 이같은 정황이 실제로 나타난다. 서동용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과학고 진학자 중 대형 학원가가 형성된 5개 구(강남3구·양천구· 노원구)출신 학생들의 과학고 진학 비율은 12.6%(287명)에서 8.0%(166명)으로 줄었다.

반면 자사고 진학 비율은 같은 기간 24.3%(3366명)에서 28.2%(2940)명으로 늘었다. 과학고와 영재학교 자퇴도 늘었다. 종로학원 분석에 따르면 2015~2018년 23명이었던 이들 학교 중도이탈은 2019~2022년 69명으로 3배 늘었다.

의대를 목표로 이들 학교를 떠나는 학생도 늘었지만, 내부에서 불이익을 감수하고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도 늘었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의약학 계열에 진학한 과학고 학생은 2020년 62명에서 2021년 72명, 2022년 83명으로 늘었다.

박춘성 한국영재교육학회장은 “현재는 영재교육기관들도 입시 위주로 변질된 측면이 있어 인력양성이란 목적성이 흐려졌다”며 “이공계 영재들이 계속해서 진로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고등학교와 대학 차원에서 부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klee@heraldcorp.com
an@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All Rights Reserved.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