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6 (화)

이슈 이태원 참사

혹한 추위도, 불볕 더위도…지난 1년 유족 곁을 지켜온 이들[이태원 참사 1주기-⑤참사가 남긴 것]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봉사자분들이 있으셔서 ‘이 사회가 그나마 살만한 세상이구나, 따뜻한 세상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이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지현씨의 어머니)

지난 2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경향신문을 통해 자원봉사자와 추모객, 시민단체 활동가 등 자신들을 위해 팔 걷고 나선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들의 연대는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이 쏟아지는 냉대를 견디는 힘이 됐고, 유가족이 ‘베풀고 살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디딤돌이 됐다. 굳게 닫힌 피해자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낸 것은 정부도 국회도 아닌 동료 시민들이었다.


☞ [전문]이태원 핼러윈 참사 유가족이 시민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메시지[이태원 참사 100일]
https://www.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2302021652001


경향신문은 지난 1년간 다양한 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유가족의 곁을 지킨 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생업을 접고 분향소를 지키거나, ‘혼자 둬선 안된다’며 스스로 지킴이가 되거나, 분노도 슬픔도 모두 자신의 것처럼 떠안고 함께 걸으며 유족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꽁꽁 얼었던 마음…봄 햇살, 여름 더위, 가을 바람 함께 맞으며 녹았다


경향신문

10월17일 김미경씨가 서울 중구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희생자 앞에 놓인 꽃을 정리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미경씨(62)는 울 수 없었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슬픔은 영하의 날씨에 임시 분향소를 지키고 선 참사 유가족 앞에서 얼어붙었다. 지난해 12월14일은 이태원역과 녹사평역 사이, 이태원 광장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진 날이다. 이날 희생자들의 영정 사진이 처음 놓였다. 분향소를 빼곡 채운 얼굴들이 너무 곱고 맑았다.

그 날 이후, 서울 중랑구에 사는 김씨는 매일같이 이태원 분향소를 찾았다. 무작정 보탬이 되고 싶었다. 실의에 빠진 유가족에게 차 한 잔, 커피 한 잔 건네며 시작한 봉사는 헌화 정리, 조문객 안내, 비품 정리까지 영역이 넓어졌다. 아침에 분향소에 도착해 이곳저곳 할 일을 찾다보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11시간이 훌쩍 지났다.

김씨는 피부관리사로 일했다. 피부관리 일과 분향소 봉사활동을 병행했지만, 영정을 바라보던 유가족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마음이 항상 녹사평에 가 있었어요.” 20년 넘게 해온 피부관리사에서 ‘전업 자원봉사자’로 이직한 이유였다.

김씨가 처음 분향소를 찾았을 때 유가족들은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상처와 슬픔 탓에 모든 것을 경계할 때였다. 김씨가 건네는 종이컵을 받지 않기도 했다. 위축되기보다, 김씨는 더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드세요. 조금이라도 마셔보세요. 뭐라도 먹어야 버틸 수 있어요.” 그렇게 하루 이틀이 사흘 나흘이 되고 일주일이 되던 날 분향소를 지킨 김씨에게 유가족 중 한 명이 처음으로 “안 드세요?”라며 빵을 건넸다.

김씨는 두툼한 솜바지에 핫팩을 끼고 한겨울 추위를 유가족과 함께 견뎠다. 물에 적신 수건을 머리에 걸치며 불볕더위를 같이 나눴다. 그렇게 열흘, 한 달, 1년이 돼가는 지금 김씨는 유가족에게 또다른 식구다. “팀장님, 커피 한 잔만 주실 수 있어요?” 위로로 유가족을 끌어안았던 김씨를, 이젠 유가족이 반가움에 끌어안는다.

힘든 일도 많았다. 지난 2월 서울광장 분향소를 철거하려던 서울시·경찰을 막으면서 김씨는 충격에 빠졌다. 유튜브 촬영용인듯 카메라를 챙겨든 이들이 분향소를 찾아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냈다. 처음엔 놀란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지만, 허다하게 겪고 나선 요령이 생겼다. 그런 이들이 찾아오면 김씨는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유가족을 둘러싼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악을 써요. 그러면 봉사자 서너명이 나와서 유가족이 그 사람 못 보게 가려요. 싸울 순 없잖아요.”

김씨는 분향소를 지키는 지난 10여개월간 고마운 이들을 여럿 만났다. 부산에서 와 2박3일을 꼬박 봉사하고 돌아간 시민,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봉사하러 온 미국 교포, 자원봉사자에게 ‘고맙다’며 굴국밥 한 끼를 사준 후원자 등 수십 명의 봉사자들이 분향소를 거쳐갔다.

김씨가 팀장을 맡은 자원봉사단은 “이제는 그만하셔도 된다”는 유가족 요청을 받아들여 참사 1주기인 지난달 29일 해단했다. 봉사단은 없어졌지만, 김씨는 여전히 유가족들과 끈을 이어가고 있다. “9년 전 세월호 참사 분향소에서 봉사를 못한 것이 후회됐어요. 그땐 여건이 되지 않았거든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이들의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김씨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숙님을 어떻게든 밖으로 불러냈다”


경향신문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 김현숙씨의 친구 오연화씨. 본인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참사 이튿날, 오연화씨(65)는 참사 희생자 고 최재혁씨의 모친 김현숙씨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들이 죽었어요.” 평소 유쾌한 성격으로 주변을 밝히던 김씨였기에, 눈물에 잠긴 목소리가 더 낯설었다. 오씨는 김씨 곁에서 함께 울며 3일장을 지켰다. 그들은 15년 전부터 시작된 인연을 이어온 이웃사촌이었다.

장례식을 마친 후, 오씨는 동네 친구 세 명과 모여 다짐했다. “‘김현숙 지킴이’가 돼야겠어요.” 임무는 하나였다. “절대 현숙씨를 혼자 둬선 안됩니다.” 세상이 무너진 슬픔 속에 김씨를 홀로 뒀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걱정이 앞섰다. “추어탕 사놨는데…” “병원 갈 때 됐죠? 같이 가요.” “아들 위해 같이 모여 기도해요.” 그렇게 지킴이들은 김씨의 집을 불쑥 찾아 김씨를 일으키고, 동네 식당으로 불러 김씨를 먹이고, 교회로 데려가 김씨를 위해 기도했다. “모이려고 별별 핑계를 다 댔죠. ‘혼자 계시면 안되요, 안 넘어가도 먹어요’ 신신당부도 했고요.” 김씨가 귀가할 때면 늘 손엔 봉투가 들려 있었는데, 대부분은 오씨가 ‘꼭 챙겨먹으라’며 들려보낸 음식이었다.

직접 만나지 않을 땐 지킴이들이 돌아가며 전화를 걸거나 ‘카톡’ 안부를 물었다. 직접 가지 못할 때는 미역국을 배달시켜 문 앞에 걸어뒀다. “손주, 며느리 생각해서라도 힘 차려야죠.” “마음 강하게 드세요.” 당장 전해지지 않을지언정, 지킴이들은 쉬지 않고 위로하고 당부했다. 정부가 유가족에게 지원하는 트라우마센터 상담을 김씨에게 권유한 사람도 오씨였다.

“아들도 현숙씨가 일어서길 바랄거에요.” 이들은 김씨가 아들이 일하던 회사에 갈 때도 동행했다. 아들이 앉았던 의자, 아들이 일하던 책상 앞에서 무너질 듯 우는 김씨를 토닥이고 달랬다. 지킴이들은 지난 3월 제주 여행을 핑계로 김씨를 매일 만났다. 잠시라도 슬픔을 벗어날 수 있을까봐 렌트카 예약, 식당 검색 등을 같이 하며 김씨의 신경을 돌렸다. 혼자 앉은 버스에선 눈물을 참지 못했던 김씨도, 친구들과 함께일 땐 담담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씨 역시 김씨 아들 또래 자녀 두 명이 있다. 참사 희생자 최씨가 아들의 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놀러 갔다고 죽어야할 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더욱 서로를 배려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 일 같지 않아서, 옆에 있는 것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오씨가 김씨의 곁을 한결같이 지켜온 이유다.

19번의 동행…그 자체로 힘이 됐기에


경향신문

10월28일 장헌권 목사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게 전달할 시와 편지가 담긴 책자를 바라보고 있다. 김송이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 맞은 첫 설 명절. 장헌권 목사(66)는 광주에 있는 희생자 유가족들이 광주송정역 앞에서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홍보활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함께 해야겠다.’ 장씨는 가족들과 함께 귀성객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장 목사는 그 이후로도 보라색 조끼를 입고, 손팻말을 든 채 전남 지역 희생자 유가족들 곁을 지켰다.

장 목사는 이태원 가족을 보면 세월호 가족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1년여간 재판 방청차 광주 법원을 오가던 유가족을 위로했다. 장씨는 “광주는 5·18의 아픔이 있는 도시인데 그 상처가 두 참사의 가족들에게서 보였다”며 “국가 부재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과 같이해야겠다고 느꼈다”고 했다.

장 목사는 지난 6월24일부터 참사 1주기 전날인 지난달 28일까지 매주 토요일 전남 지역 유가족과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하라’라고 쓰인 보라색 조끼를 입고 광주 시내를 행진했다. 매주 20여명의 시민이 유가족과 함께 했지만 19번 행진에 모두 참여한 것은 장 목사가 유일했다.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되니까요.” 폭우와 더위 속에서도 장 목사는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가 오면 같이 맞고, 땀이 나면 같이 흘렸다. 유가족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자녀 얘기를 하며 걷던 날에는 귀 기울여 듣고, 엉엉 소리내 우는 날에는 같이 마음 아파했다. 그는 마음이 하나가 되면 몸이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고비도 있었다. 재판받는 용산구청과 용산경찰서 관계자들이 보석으로 풀려나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이 기각됐을 때 가족들의 실망과 울분을 지켜봐야 했다. 그때마다 장씨는 “함께 가자”고 그들을 다독였다. “멀리 가려고 하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어요.”

마지막 행진을 한 지난 28일, 장씨는 가족들에게 선물을 준비했다. 행진 때마다 누구와 어떻게 걸었는지 적은 일지와 전남 지역 희생자 한 명 한 명에 대해 쓴 시였다. 다섯 편의 시에는 그간 가족들이 들려준 다섯 청춘의 이야기가 녹아있었다. 장씨는 참사와 희생자에 대한 기록이자,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했다. “안전한 사회는 우리 모두가 참사를 기억해야 만들 수 있죠. 그 기억을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진실을 알려갈 것입니다.”




☞ 놀러 가서, 죽었다[이태원 참사 1주기]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10241507001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 독립언론 경향신문을 응원하신다면 KHANUP!
▶ 나만의 뉴스레터 만들어 보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