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상황이 되자 코왈스키는 스톤을 안심시키며 그녀를 두고 우주로 떠난다. 나는 심드렁한 기분으로 어차피 그가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이 죽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코왈스키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스톤이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기적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것은 스톤의 환각으로 드러난다. 나는 영화 막바지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아, 그러니까, 샌드라 블럭이 맡은 배역이 주인공이야? 조지 클루니의 배역은 아까 죽은 게 맞고?
생각해 보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소설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잘못 읽었다. 크리스티는 고전 미스터리 작가답게 각종 반전을 처음 사용하는 영광을 여러 번 누렸다. ‘사실 용의자가 모두 범인’ ‘사실 피해자가 범인’ ‘사실 탐정이 범인’ ‘사실 범인이 없음’ 정도로는 과거의 작가들을 뛰어넘지 못한다. 나도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반전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피해자가 범인이라니, 결말을 알아서 아쉽지만 과연 얼마나 치밀하게 복선을 깔았는지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피해자인 로저 애크로이드는 범인이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내용을 잘못 알았던 덕분에 나는 용케도 반전을 만끽했다.
반전에 국한하지 않아도, 작품 장르를 알면 이후 전개를 예상할 수 있다. 로맨스의 주인공은 연인을 만나 행복해진다. 로맨스를 보는 사람은 초반부터 바로 ‘남주’ ‘여주’ 등을 알아본다. 주인공들이 아무리 싹수없게 처신하고 개처럼 싸워도, 독자는 그들이 결국 서로 사랑에 빠지리란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스터리에선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등장하고, 호러에선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만일 로맨스 작품을 호러일 거라 착각하면 자신에게 크나큰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게 된다. 등장인물의 로맨틱한 언행을 사사건건 의심한다거나, 평화로운 장면에서 불안 요소를 잔뜩 감지하는 등, 작품이 전혀 의도치 않은 재미를 마음껏 창출할 수 있다.
때때로 장르를 교란하는 작품도 유사한 재미를 준다. 드라마 <킹덤>에는 좀비 사태를 마주한 사람들이 ‘장손을 어떻게 죽이냐’며 상황을 악화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우다영의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는 SF에서 흔히 제조하는 것과는 다소 상이한 조합을 사용한다. 이쪽은 내가 괜히 착각하는 경우와 달리 배신감 같은 후유증이 남지 않는다. 부디, 절 많이 속여넘겨 주시기를.
심완선 SF평론가 |
심완선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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