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부터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날만 그런 게 아니었다. 폭 110m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자 시내를 관통하는 ‘7월 9일 대로’나 지하철역도 집회·시위 등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지난 6월 피파 U-20 월드컵 한국 대표팀의 4강전이 있던 날에는 원주민 시위대가 1번 고속도로를 막아서면서 1시간 남짓 거리를 3시간 만에 도착했다. U-20 월드컵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현 정부가 인기를 얻기 위해 야심 차게 추진한 대회인데도 이를 방해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지켜보기만 했다. 시위대를 마주한 차들은 기껏해야 경적을 몇 차례 울릴 뿐 어찌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택시 기사는 기자에게 “이게 아르헨티나”라고 말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원주민 시위는 평소 자주 벌어지므로 그날 그 장소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르헨티나가 집회·시위를 얼마나 강력히 보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집회·시위에 대한 보장을 주제로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면 대부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 답한다. 일종의 자포자기다. 오는 22일 진행될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일부 후보가 시위 장소를 제한하고 강경 통제하겠단 공약을 내걸었지만, 이전 정부에서 실패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불만을 표하면서도 어찌하지 못해 무력감을 느끼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지난달 법원은 표현의 자유 보장과 함께 “편도 4개 차로 중 3개 차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심각한 교통 불편을 줄 우려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민노총의 국회 앞 노숙 집회를 허용했다. 시위로 인해 잦은 차량 통행, 지하철 운행 방해로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봤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무력감.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부에노스아이레스=서유근 특파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