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본지 단독 인터뷰
박근혜 전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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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탄핵과 관련해 국민에게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해서 맡겨 주신 직분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많은 실망과 걱정을 드렸던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시 비선실세로 불린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사익편취ㆍ국정농단에 대해서도 “검찰 조사에서 듣고 정말 너무 놀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불찰이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2021년 12월 31일 특별사면된 이후에 줄곧 침묵하던 박 전 대통령이 중앙일보와 첫 언론 인터뷰를 갖고 재임 시 공과와 옥중생활 등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최씨의 비위를 알지는 못했지만 탄핵 사태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며 회한(悔恨)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그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임기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인다”면서도 “‘정책적으로 실패한 정부’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정책이 잘못됐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위안부 합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체결 등 재임 시 외교안보 분야의 주요 결정에 대해 “안보를 위해서 꼭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일을 정말 하늘이 도우셨는지 다 하고 감옥에 들어가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총선 때 친박계 인사들의 출마설에 대해 “(출마가) 저와 연관된 것이란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 인연은 과거 인연으로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선을 그었다. 국정농단 특검팀의 윤석열 수사팀장이 보수 진영의 대선후보가 돼 정권교체를 한 데 대해 “좌파 정권이 연장되지 않고 보수 정권으로 교체된 것에 안도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10월 4일부터 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87)’에 자신의 재임 시 활동을 반추하는 회고록을 연재할 예정이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오후 박 전 대통령의 대구시 달성군 사저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다음은 주요 일문일답. 인터뷰 풀영상은 더중앙플러스에서 볼 수 있다.
Q : 특사 이후에 공식 인터뷰는 처음이다. 국민들께 드릴 말씀이 있다면.
A : “먼저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해서 맡겨 주신 직분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많은 실망과 걱정을 드렸던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제가 힘들고 어려웠던 오랜 기간 전국 각지에서 변함없이 저를 믿고 지지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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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친박은 없다…출마, 나와 연관짓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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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가 유명을 달리하신 다섯 분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죄송함을 느낀다. 그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분들께 진심 어린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Q : 탄핵사태는 최서원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어떻게 인연을 맺었고 역할은 무엇이었나.
A : “최서원 원장(최씨가 과거 유치원 원장을 지내 평소 ‘최 원장’으로 호칭)은 최태민 목사의 딸이라서 알고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1998년에 제가 대구시 달성군 보궐선거에 나오면서 최 원장의 어머니가 달성에 와서 저를 도와주었고, 또 그때 최 원장의 남편인 정윤회 실장도 함께 와서 도와줬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청와대로 들어오면서 사적인 심부름을 할 사람이 없었다. 제가 여성이니까 (남성) 비서관들한테 시키기 어려운 것들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최 원장이 청와대에 드나들면서 심부름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 번도 최 원장이 저를 이용해 사적인 잇속을 챙긴다거나, 이권에 개입하거나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심 없이 저를 도와주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Q : 최서원씨는 미르, K스포츠 재단 운영에 개입했다. 당시 이런 사실 인지하지 못했나.
A : “K스포츠재단, 미르재단 이사진을 최 원장으로부터 추천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검증을 거쳤고, 그 분야에서 전문성이 탁월한 분들이라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처음에 최 원장이 ‘재단 이사진으로 좋은 사람들을 소개할까요’라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은 것을 정말 많이 후회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며 들으니까 최 원장이 재단 실무진의 면접도 보고 운영도 관여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불찰이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Q : 미르, 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롯데ㆍSK가 낸 출연금이 뇌물로 인정됐다. 대기업 총수들과 개별 면담을 통해 기금 지원을 요청했나.
A : “롯데가 K스포츠재단에 기부했다가 돌려받은 돈, (K스포츠재단이) SK로부터 지원받기로 했다가 포기한 것에 대해 법원이 제3자 뇌물죄를 인정했다. 그런데 이 판결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 죄는 부정한 청탁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롯데나 SK가 저한테 어떤 청탁도 한 적이 없다. 대통령 면담이니 기업의 애로사항이나 현안에 대해 말을 했겠지만, 저는 하나도 들어준 것이 없다. 대기업이 체육 진흥을 위해 후원했다면 그것이 국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지, 대가성을 가지고 후원하는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룹 회장들에게 제가 구체적으로 후원 금액을 요구한 적이 없다. 결과적으로 최 원장이 재단을 통해 사적 이익을 챙기려고 했었다면 그것을 알지 못한 제 책임이고, 사람을 잘못 본 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Q : 2013년 5월부터 2016년 9월까지 남재준·이병기·이병호 등 전 국정원장들에게 특활비 36억5000만원을 받은 걸로 확인됐다. 왜 받았고, 그 돈은 어떻게 쓰였나.
A : “취임 초 보좌진으로부터 국정원에서 청와대 운영과 관련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돈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고, 또 ‘역대 정부에서도 (국정원이) 그런 지원을 해왔다’길래 그러면 ‘지원받아서 일하는 데 쓰라’고 했다. 다만 어디에 썼는지 보고를 받은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특활비를 제 사적 용도로 쓴 것은 전혀 없다. 2016년 9월께 당시 이병호 원장이 2억원을 보내와 정호성 비서관이 관저로 와서 저한테 전달해 줬다. 제가 그것을 청와대 직원들 추석 격려금으로 사용한 것은 맞다. 이유야 어찌됐건 제 지시로 청와대에 지원한 것 때문에 세 분의 국정원장이 많은 고초를 겪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다. (특활비에 대해) 법적 검토를 받지 않았던 것은 정말 후회스럽다. 이 모든 것은 제 책임이지 이 세 분한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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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에 꼭 필요한 사드·지소미아…다 하고 감옥 가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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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 불법 개입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이 선고됐다. 당시 유승민 의원 등 비박계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친박계를 공천하기 위해 청와대가 ‘친박 리스트’를 관리하고 불법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혐의다.
A : “‘대통령이 총선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 정말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가 몇몇 사람에 대해서는 말했겠지만, 구체적으로 리스트를 만들어 당에 전달하면서 ‘이 사람들은 꼭 공천하라’고 한 기억은 전혀 없다. 수석비서관회의 때 정무수석이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게 당에서 (조사를) 해서 청와대에 전달한 걸로 생각했다. 그리고 ‘진박 감별사’라는 얘기가 있어서 제가 (친박계에) 주의를 줬는데, 정말 그때 강하게 주의를 줬어야 한다는 후회는 있다. 그리고 제가 명시적으로 유승민 의원 공천을 주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진이 제가 유 의원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공천 파동은) 제 책임이다. 당시 김무성 대표가 공천과 관련해 저한테 면담 요청도 했고, 전화 연결도 부탁했는데 그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 얘기를 제가 구치소에 들어와서야 전해 들었다. 당시에 저는 전혀 몰랐던 일이고 그래서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나’ 하고 분노했지만 누구를 탓하겠나. 그것도 대통령인 제 책임이라고 본다.”
Q : 2017년 10월 일체의 재판을 거부하고 이후 법정에 안 나온 이유는.
A : “국정 운영을 하면서 제가 일부 실수는 있었겠지만 뇌물죄로 기소되고 탄핵당할 정도의 잘못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네 번의 재판도 감수하면서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랐어도 법원을 믿고 버틴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법원이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것을 보면서 ‘공정한 재판이나 결론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판 포기를 통보했다. 어떤 형량이 나오든 결국은 나중에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다.”
Q : 국회 탄핵 표결 때 일부 친박계 의원들도 찬성표를 던진 걸로 알려졌는데.
A : “소위 ‘친박’이라는 의원 중에 탄핵에 찬성한 의원도 있었고, 저의 오랜 수감 기간 동안 한 번도 안부를 물은 적이 없는 의원이 대부분이다. 동생(박지만 EG 회장)의 친구인 의원도, 원내대표였던 의원도 탄핵에 찬성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사람의 신뢰와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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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2015년 목함지뢰 도발 사태 땐 남북 간 긴장이 준전시 상태에 달할 만큼 남북관계가 요동쳤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유화 대신 원칙적 자세를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A : “대북 정책은 ‘우리의 안보는 확실하게 지킨다’는 원칙에 충실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비록 물밑 접촉은 없었지만, 북한이 전향적 자세를 보여주면 얼마든지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밝혀 왔고, 그런 기조하에서 ‘드레스덴 선언’도 나온 것이다. 실제로 2015년까지는 남북 간의 신뢰 구축을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2016년 들어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 발사로 도발하면서 잠정적으로 교류가 중단됐다. (이후) 강력한 한·미 동맹, 국제사회와의 공조 체제를 구축해 ‘국제사회 대 북한’의 구도가 정착됐다.”
Q :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다. 당시 위안부 합의는 한·일 양국에서 모두 환영받기 어려운 외교적 난제였고, 정치적 이득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추진한 이유는.
A :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당시 24년간 한·일 간의 과거사 핵심 현안이었다. 미래 세대까지 계속 이렇게 가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합의서를 만들 때 당사자분들의 의견을 들어서 합의서를 만든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한 3대 핵심 요구사항도 바로 피해자분들의 요구였다. 물론 한·일 양국이 많은 노력과 협의를 했지만, 미국과 국제사회의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경주한 결과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Q : 문재인 정부에서 화해치유재단이 해산됐는데.
A : “국제적으로 공감대를 얻어가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만든 재단을 이렇게 깨버리면 한국의 신뢰성이 어떻게 되겠나. 이 재단이 해산된 후에 무슨 다른 대안이 있는지, 또 더 나은 어떤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Q : 2016년 하반기에 국회에서 탄핵 추진 얘기가 나올 때였는데도 외교적 난제였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체결을 강행해 당시 야당이 격렬히 반발했다.
A : “북한이 2016년에 두 차례나 핵실험을 강행하고 24차례나 탄도미사일 발사로 도발했다. 정말 엄중한 안보 상황에서 우리 군은 정보 능력 강화를 위해 지소미아 협정이 체결되기를 바랐고, 미국도 한·일 양국이 원활한 정보 소통이 안 돼 상당히 힘들어 했다. 그래서 국회에서 탄핵을 논의 중이었지만 ‘대통령으로서 안보를 위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해야만 할 일’이란 생각으로 추진했다. 그게 되지 않고 감옥에 갔다면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란 생각을 하면 다행스럽고 위로도 됐다.”
Q : 2016년 사드 배치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A : “사드는 급증하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도의 자위적 방어 조치였다. 중국이 반대했지만 국민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어디 있겠냐는 인식으로 원칙을 지켜나갔다. 사드 배치 발표 이후에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했는데 유엔 안보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조치가 들어 있는 결의안을 채택할 때 중국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 정도로 (한·중 협력은) 지속이 됐다. 사드 부지를 결정하는 데 여러 반대가 있었는데 롯데가 중국 사업의 손실을 감수하고 골프장 부지를 제공했다. 롯데그룹의 애국심에 고마움을 표시한다.”
Q : 구속 수감된 상태에서 문재인 정부의 탄생을 지켜봤는데 어떤 심정이었나.
A : “대선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참 착잡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에 북핵에 대한 대응 방식이라든가, 동맹국들과의 불협화음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나라 안보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됐다.”
Q : 2020년 총선 당시 옥중 서신을 통해 “기존의 거대 야당(미래통합당, 현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여러분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린다”고 했는데 당시 어떤 생각이었나.
A : “총선에서 (보수가) 다수당이 돼야 문재인 정부를 견제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마음에서 우선은 일단 단결해 선거에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도 개인적으로 여러 불편함이 있었지만 다 제쳐놓고 우선은 ‘보수 세력이 단결해야 된다’는 메시지를 낸 것이다.”
Q : ‘박근혜 정부는 실패한 정부’라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 : “제가 임기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가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책적으로 실패한 정부다’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정책이 잘못됐다는 건지 모르겠다. ‘통진당 해산’이라든가 ‘공무원 연금개혁’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등은 국운이 달린 문제라 어떤 것을 무릅쓰고라도 꼭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창조경제 혁신센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역할을 기대하면서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정책이다. 제가 탄핵되기 전부터 벌써 상당한 성과가 나오기 시작해 보람을 많이 느꼈다.”
Q : 공무원연금개혁은 결국 정치적 부담이 돼서 2016년 총선 패배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공무원연금개혁을 총선 이후로 늦춰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A : “그런 게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무원연금개혁은) 오랫동안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못 댔다. 시한폭탄같이 터질 것을 뻔히 알면서 그냥 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결심하고 나서지 않으면 이것은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국민들께 공무원 연금 적자 때문에 하루에 80억원씩 세금이 들어가고, 올해 개혁하지 못하면 내년부터는 하루 100억원이 들어간다는 것을 많이 알렸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합의 기구를 만들어 많은 논의를 한 끝에 결정 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총선에) 영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부담이 커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개혁을) 안 했다면 오히려 자책을 더 많이 했을 것 같다.”
Q : 국정농단 사건 특검의 팀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이 보수 진영의 대선후보로 정권 교체를 이뤘다. 현 정부의 방향성과 국정 운영은 어떻게 보나.
A : “우선은 좌파 정권이 연장되지 않고 보수 정권으로 교체됐다는 데 안도했다. 당시 수사팀에 참여했던 검사 중에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이라든가 요직에 여러 분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인사는 인사권자가 선택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4개월 정도 됐는데, 정부의 방향ㆍ정책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좀 성급한 감이 있다. 더군다나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런 문제에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Q :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과거 친박계 인사들이 출마해 재기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A : “개인적으로 내년 총선에 별 계획이 없다. ‘정치적으로 친박은 없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 과거에 정치를 했던 분이 다시 정치를 시작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제가 언급할 일이 못 된다. 다만 정치를 다시 시작하면서 이것이 저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고, 저와 연관된 것이란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 인연은 과거 인연으로 지나갔으면 좋겠다.”
Q : 우리공화당은 지금도 ‘탄핵 무효’를 주장한다. 만약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 명예 회복’을 명분으로 내년 총선 후보를 낸다면.
A : “우리공화당이 탄핵 무효를 주장하면서 고생을 많이 한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일반 국민의 입장과 정치인의 입장은 순수성에 있어서 다르다고 본다. 내년 총선에서 정치인은 자기 정치를 하면 된다. 선거에 나서면서 제 사진을 내걸고 ‘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출마하는 것’이란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지난 몇 년간 저를 위해 고생하신 많은 국민께는 무한한 감사함을 느낀다.”
Q : 이제 71세가 됐다.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A : “지금까지 개인적인 삶보다는 공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은데 그것도 운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 일선은 떠났지만 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려고 한다. 그것이 국민들이 보내주신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인터뷰 전문과 영상은 ‘더중앙플러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터뷰 전문(1만3000여 자)과 전체 인터뷰 영상(36분 분량)은 중앙일보의 프리미엄 구독 서비스인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왼쪽 QR코드를 휴대폰으로 찍으면 연결됩니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87).
회고록은 10월 4일부터 ‘더중앙플러스’에 연재
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추석 연휴 직후인 10월 4일부터 ‘더중앙플러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1회는 ‘북한 3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위기’입니다. 매주 3회씩 연재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4월부터 중앙일보 회고록팀과 대구시 달성군 사저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회고록 집필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2011년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을 맡았을 때부터 2021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할 때까지의 약 10년이 배경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 사태’의 전말과 특검 수사·재판을 비롯해 북한 4·5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폐쇄, 공무원연금 개혁, 세월호 참사,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당청 갈등, 창조경제, 인사 실패 등 재임 중 벌어졌던 주요 이슈들을 돌아보면서 당시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느꼈던 소회를 진솔하게 밝힐 예정입니다.
그동안 전직 대통령 회고록은 과거 참모들이 중심이 돼 제작·발간했던 게 관행이어서 공적은 상세히 기술하지만 과오는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회고록은 박 전 대통령의 구술을 언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방식이어서 공과 과를 균형있게 다루고, 독자들이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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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김정하 논설위원, 유성운·손국희 기자, 사진·영상 권혁재·김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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