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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진중권 칼럼] 뜨거운 선언과 썰렁한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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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진중권 광운대 교수


1960년 4월 25일 오후 3시 27개 대학교수 258명이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교수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3·15 부정선거와 4·19 사태의 책임을 물으며 ‘즉시 하야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400여 명의 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는 계엄 상황이었기에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국민들에게 ‘지식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잇단 시국선언, 사회적 반향은 약해

탄핵·하야의 정치적 명분 부족한 탓

사법 리스크 걸린 누군가만 돕는 꼴

보편적 상식·가치 지니는지 자문을

제자들의 희생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교수들이 나섰다는 거룩한 명분. 이는 학생과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흑백의 사진으로 기록된 교수들의 시가행진은 제1공화국 몰락의 결정적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 대학가엔 시국선언의 봇물이 터지고 있다. 규모가 4·19 때의 무려 열 배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전국 교수들의 수가 벌써 3000명을 넘었단다. 거기에 연구자와 재학생, 동문 단체들까지 이 선언에 가세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국선언을 바라보는 사회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다. 여야 정치권의 소모적인 정쟁에 충분히 지쳐있는 일반시민들의 눈에는 그저 ‘늘 하던 사람들이 늘 하던 짓을 하는’ 현상 정도로 비치는 모양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이유가 있다. 첫째, 명분의 부족이다. 민주당에선 “이승만 정권의 비참한 전철” 운운하며 “역대 대통령 가운데 본인과 가족을 대상으로 한 특검을 거부한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이 유일하다”고 말한다.

특검을 거부하는 것을 정치적으로는 비난할 수 있을지언정, 그게 탄핵이나 하야까지 논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은 아니다. 그저 ‘특검의 거부가 이재명 대표와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면 족하다.

하야나 탄핵의 요구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 명분이 여야,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넘어선 공통의 사회적 합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보복’이라는 당파적 감정에 호소해 ‘대통령 지지율 끌어내리기’ 용으로 남용되고 있다.

둘째,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 요즘 시국선언 한다고 누가 잡아가는가? 대학가에서 한마디 했다가 고초를 당한 유일한 사례는 문재인 정권 시절 ‘표창장이 위조’라고 했다가 감사받고 쫓겨난 동양대 총장의 경우. 그때 그들은 모두 침묵했었다.

셋째, 이중 잣대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대학가에 시국선언이 봇물 터졌었다. 그때 기폭제가 된 게 정유라의 입시 비리. 근데 조국 자녀들의 여러 입시 비리에 연루된 대학들의 정의로운 교수님들께선 다들 입을 다물고 계셨다. (이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겠다.)

넷째, 학생들의 고통과 아무 상관이 없다. 4·19 때 학생들은 국가폭력으로 고통을 받았다면, 요즘 학생들은 죽을 만큼 힘든 삶의 조건으로 고통받고 있다. 제자들의 고통보다 ‘김건희 특검’에 더 관심을 보이는 교수들이 얼마나 존경스러울까?

주목할 것은 두 현상 사이의 이 현격한 온도 차다. ‘뜨거운’ 선언의 열기와 ‘썰렁한’ 사회의 분위기. 이 온도 차는 이번 시국선언이 일반의 민심보다는 외려 민주당에서 밀어붙이는 탄핵 드라이브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대통령이 국민들의 열통을 터지게 하는데도 정작 민주당에서 추진하는 탄핵 집회에는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다. 1차 집회 1만7000명, 2차 집회 1만5000명, 3차 집회 2만5000명, 4차 집회 9000명. 참가자의 수는 외려 줄어들고 있다.

민주당에선 열심히 성냥으로 불을 지피려 하는데, 국민이라는 장작은 그동안 먹고 사느라 흘린 땀과 눈물로 속까지 흠뻑 젖은 상태. 그래서 특단의 조치, 즉 전국 대학가의 시국선언이라는 ‘번개탄’이 필요했던 게다.

이를 국민들은 모르지 않는다. 또 하나 국민들이 모르지 않는 게 있다. 즉 ‘탄핵’, ‘하야’와 같은 극단적 시나리오가 사법 리스크에 걸린 누군가의 대권 시간표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국민이라는 배우들이 그 시나리오에 맞춰 연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촛불이 출범시킨 정권 아래서 ‘촛불’의 정치적 자산이 철저히 횡령당하는 과정을 지켜본 국민들은, 탄핵을 또 해봤자 어떤 부패정치인과 그 주위의 탐욕스런 기회주의자들에게만 좋은 일 해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수들이 시국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 하지만 사회적 반향을 받으려면 일단 그 명분이 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가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지금이 그러한가?

너무나 뜨거운 선언과 너무나 싸늘한 민심. 그 현격한 괴리 속에서 우리는 질펀한 이권, 혹은 철 지난 이념의 관성으로 묶인 그들 공동체만이 느끼는 어떤 실존적 처절함, 어떤 종말론적 절박함만을 본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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