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 수석논설위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위증교사 사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내놓은 일성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이었다. 국민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어려움은 “큰 바닷속 좁쌀 한 개 정도”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민생은 어렵다. 이 대표는 여러 차례 민생을 최우선으로 두는 발언을 해 왔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도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먹사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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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반도체특별법 제동
양곡법 등 포퓰리즘 법은 강행
이 대표 ‘민생’ 진정성 증명을
그러나 그가 이끄는 민주당이 국회에서 민생을 살뜰히 챙기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늘의 민주당은 의석수가 적어 반대밖에 할 수 없었던 과거 야당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경제 살리기 입법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모습이 목격된다.
두 가지만 얘기해 보자. 우선 반도체특별법. 위기에 빠진 반도체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추진되는 법이다. 민주당은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에 한해 ‘주 52시간제’ 적용을 예외로 하자는 조항에 한사코 반대한다. ‘주 52시간제’ 무력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그러면서 근로기준법상 특별연장근로나 탄력근로·선택근로를 활용하라고 한다.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다. 최신 반도체 칩 개발엔 최소 6개월~1년 이상의 초집중 기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첨단 칩과 공정 개발 과정에서 돌발사태라도 생기면 며칠씩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대만 TSMC가 24시간 3교대로 R&D 팀을 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택근로는 최대 3개월, 탄력근로는 근로시간 사전 합의 등의 조건이 있다. 특별연장근로(최대 6개월)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 이런 겹겹의 제약이 실효성을 떨어뜨린다. 올해 삼성전자 반도체 R&D 인력 4만여 명 중 특별연장근로를 한 경우가 4%(1700여 명)에 불과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초격차를 자랑하던 한국 반도체가 위협받고 있는 것은 R&D 경쟁력의 저하가 큰 요인이다. 그 근저엔 획일적인 ‘주 52시간제’가 있다. 문재인 정권이 박아 놓은 대못 규제다. 대만, 미국, 중국 등의 기업들이 밤새워 연구할 때 우리는 R&D 인력을 강제 퇴근시켜야 한다. 업계는 현 상황을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라고 절규한다. 말로는 국가 명운이 걸렸다면서 정작 반도체 업계의 숙원 사항을 묵살하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것인가.
두 번째는 민주당이 상임위와 법사위에서 단독 처리한 양곡법 개정안 등 농업 관련 4개 법안.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농업의 미래를 망치는 ‘농망(農亡) 4법’”이라고 격분했다. 이 중 양곡법 개정안은 남는 쌀을 정부가 의무 매입하는 내용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여기에 ‘양곡가격안정제도’가 추가됐다. 시장가격이 평년 가격 밑으로 떨어지면 차액을 정부가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 법대로라면 농가는 쌀이 남아도, 가격이 떨어져도 걱정할 게 없어진다. 언뜻 보면 쌀 농가를 돕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게 돌아간다. 농사를 짓기만 하면 수매도, 수입도 정부가 보장해 주는데 누가 다른 농사를 지을까. 지금도 쌀은 공급 과잉이다. 2024년산 쌀만 해도 5만6000t이 남는다. 정부는 매년 5000억~1조원을 남아도는 쌀 매입에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되면 쌀은 더욱 공급 과잉이 되고 쌀값은 더 떨어질 게 뻔하다. 양곡법 개정은 농가를 쌀농사에 묶어두고 국민 세금을 들이붓는 악성 포퓰리즘일 뿐이다.
이 대표는 민생과 경제를 얘기하고, 민주당은 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대표는 진정성을 의심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그의 대권 행보에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 그가 21대 국회 막바지에 목소리 높였던 연금개혁도 감감무소식이다. 이번이야말로 이 대표가 ‘창해일속’과 ‘먹사니즘’이 진심이라는 걸 제대로 증명할 기회다. 반도체특별법은 서둘러야 하고, 양곡법 개악은 멈춰야 한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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