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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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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 인터뷰 | 윤석열 대통령의 스승 송상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시대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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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생존하자면 적(敵)과 동지 구분해야”

■ “가짜 뉴스, 허위 정보 방치하면 누가 와도 대한민국 통치 어려워”

■ “윤 대통령 직설 화법은 소신대로 맺고 끊는 평소 성격 드러난 것”

■ “잔재주 부리지 않아… 지지율 1%로 떨어져도 팬덤 기대지 않을 것”

■ “글 모음집에 나타난 고하 송진우는 중용적 진보라는 시각도”

중앙일보

송상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9월 5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역사 문제는 정확한 팩트를 아는 게 우선이고, 그에 기반을 둔 주장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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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81)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지도자였던 고하(古下) 송진우가 그의 할아버지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고하에게 추서했다. ‘상훈법’1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서훈이 건국훈장이다. 고하는 기미년 3·1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한 민족대표 48인의 한 명이다. 중앙학교 교장, 동아일보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 등 학계, 언론계, 정계를 두루 아우른 20세기 초반 암흑기 민족사의 광점(光點)이기도 했다.

지난 8월 재단법인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는 고하 관련 책 두 권을 펴냈다. 고하의 일대기를 담은 [독립을 향한 집념] 증보판, 고하 관련 글 모음집인 [거인의 숨결] 증보판이 그것이다. 이 두 책의 초판은 고하 탄생 100주년인 1990년 발행됐었다. 이후 새로 밝혀진 역사적 사실과 자료를 더해 이번에 증보판으로 엮었다고 송상현 교수는 밝혔다.

고하가 활동했던 그 시절이 요즘 다시 소환된다.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대한민국 건국 시점 등 역사·이념 논쟁으로 한국 사회는 후끈 달아올랐다. 구한말-일제강점기-해방 공간으로 이어지는 격동기는 갈등과 불안의 연속이었고, 이런 인과관계의 잔영(殘影)은 21세기의 한국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송상현 교수는 역사 논쟁의 주역이라 할 윤석열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은사이자, 대학원 석사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송 교수는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과거의 문제를 투명하게 처리한 이들일수록 미래의 문제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월간중앙 2022년 6월 인터뷰)며 신뢰를 보냈다.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난 9월 5일 서울 마포구 서강로 유니세프한국위원회 12층 접견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송 교수는 윤 대통령의 국정 운용과 관련,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고, 잔재주도 부리지 않을 것”이라며 소신 행보를 전망했다. 또 윤 대통령의 거침없는 화법에 대해서는 “대통령 본인의 분명하게 맺고 끊는 평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면서도 “때로는 디테일을 요즘의 정치 문법에 맞게 순화할 필요는 있을지 모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얽은 얼굴도 자세히 보면 예쁜 구석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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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 송진우의 일대기를 담은 [독립을 향한 집념](왼쪽), 고하 관련 글 모음집인 [거인의 숨결]. / 사진: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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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증보판이 나온 고하 선생 글 모음집인 [거인의 숨결]을 보면 흡사 21세기 한국과 세계정세를 내다본 듯한 대목도 나옵니다. 예컨대 “자본주의의 모범인 미국과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적로(赤露, 공산주의 러시아)를 사이에 두고 양자가 상대하여 발흥되는 것은 과연 불원한 장래에 그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중제) 세계 대세의 운명이 이에서 결정될 것이며, 또한 인류의 문화상 총결산이 이에서 감정될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한가”라고 경각심을 고취하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식민지 한반도에 앉아 세계 패권의 흐름을 통찰하는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소년 시절의 고하는 ‘민권(民權)’이라는 단어에 매료됐다고 해요. 결이 전혀 다른 두 단어, 즉 백성 ‘민’과 권세 ‘권’이 결합한 신조어가 자못 신기했던 것이죠. 새 문물에 대한 호기심도 대단해서 동경 유학 시절 학교를 빼먹고 유명 석학의 강연장을 쫓아다녔다고 합니다. 거기서 메모한 내용을 집에 와서 정리하고는 자신이 마치 석학이라도 된 듯 일장 연설을 하기도 했지요. 지적 호기심, 새로움에 대한 수용력이 남보다 월등했다고 할까요? 일제강점기에 세계 정치의 흐름을 꿰뚫었다면 아마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뉴스를 모스 부호 등 당시의 전신망으로 신속하게 접할 수 있었고, 이를 늘 분석해서 자기의 지식으로 삼던 덕이라고도 이해됩니다. 또 비밀리에 고하를 도와주는 분들이 주변에 있어 돌아가는 세계정세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고 추측해 봅니다. 미·소 간의 대결 등 세계정세를 다룬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는 1925년 동아일보에 실렸는데 ‘한국 근대 명논설 66편’에 선정됐지요. 여러 학자분이 그 글을 읽어보고 고하의 세계 대세를 읽는 눈과 미래를 내다보는 분석에 감탄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고하의 삶을 압축해 볼까요?

“중앙학교 숙직실을 중심으로 1919년 3·1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하셨죠. 일본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당시 대학이 없던 식민지 한반도의 중앙학교 교장으로 천도교, 불교, 기독교를 아울러 민족의 단결된 의지를 표방하는 데 앞장선 분입니다. 만세 한번 불렀다고 독립이 쟁취되는 것이 아니기에 기미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는 것을 일부러 피하고는 학생 세력, 기타 민족 세력을 조직하여 배후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밀고 나가신 핵심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3대 만세운동의 하나인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도 이분에게서 다각도로 지원받았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고하는 또 일제 암흑기 민족의 목소리를 미디어로 전파한 언론의 선구자였지요. 인촌 김성수와 힘을 모아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20년 세월을 사장, 주필, 고문 등으로 재직한 언론인입니다. 당시에 정부도 없던 시절 동아일보를 짊어지고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고취한 언론인이자 국내 독립운동세력의 중심인물이었지요.”

해방 후 나라 만들기에 동분서주하던 고하는 자택에 침입한 괴한의 흉탄을 맞아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고하의 죽음에 대해 ‘신탁통치 반대의 회오리 속에서 배후조차 분명치 않은 정치테러의 희생양’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는 이후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의 비극적 운명을 예고하는 최초의 정치 암살 사건이기도 하다.

고하가 더 오래 활동했다면 한반도 역사의 진로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고하는 우리나라 정계를 주름잡은 거물 정치인이자, 민족진영의 버팀목이기도 합니다. 고하는 해방된 날부터 12월 30일 암살당할 때까지 127일을 해방 공간에서 정치의 주역으로 활동하셨어요. 역사에서 127일은 아주 짧은 기간이지요. 고하 선생은 통이 크고 포용력, 친화력이 남달랐지요. 좌익도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 계열의 골수분자만 아니면 다 끌어안았어요. 고하는 ‘아무리 박박 얽은 얼굴일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쁜 구석이 조그맣게라도 있다’는 주의자였으니까요. 감히 말하건대 포용력의 관점에서 조선 천지에 그런 분은 없었을 겁니다. 좌익, 혁신 세력 모두 고하가 주도한 한국민주당에 합류했을 정도니까요. 경북 상주 출신으로 평생 노동운동을 했던 거물 정치인 전진한(정문헌 현 서울 종로구청장 외할아버지)이라는 분, 또는 대구 출신 혁신세력의 대부인 서상일은 물론 일제강점기의 화요회, 북풍회 등 사회주의 신봉 세력의 핵심인사들이 한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자유민주주의와 혁신 정책이 공존한 해방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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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피격 며칠 전 국민대회준비회 사무실(현 동아일보 건물) 정문을 나서는 고하 송진우. / 사진: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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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는 해방 공간을 좌와 우의 분열, 대립의 시기로 규정하고 있지요.

“고하가 흉탄에 돌아가신 뒤로 통합을 이끌 리더십 부재로 좌파 사회주의자 대부분이 한민당에서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고하가 해방 공간에서 127일 동안 독자적으로 이룩한 많은 정치적 활동이나 업적 또는 방침, 어록 등은 암살 후 그의 뒤를 이어받은 인촌 김성수의 활동과 혼동되고 말았어요. 그 결과 역사적 사실이 뒤죽박죽인 상황인지라 민족진영 내부에서도 고하의 활동 내력과 영향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미흡한 편입니다. 저는 기회가 닿는 대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세상에 알려 나갈 계획입니다. 고하를 보수우파적 민족주의자로 보는 분도 많지만, 중용적 진보 정치인으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고하의 경세(經世) 철학이 궁금하네요.

“요즘 윤석열 대통령도 그렇고, 자유민주주의라는 어휘가 많은 분에 의해 언급되지요. 고하 선생이 당시 조선 민중의 과반수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해방 공간에서 극력 설파한 게 바로 자유민주주의 이념입니다. 또 민주공화정, 자유 시장경제를 신봉했습니다. 고하의 세부 정책 노선은 그가 창당을 주도한 한국민주당 정강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시장경제론자이지만 대기업이나 국가의 이해관계가 밀접한 기업의 경우 국유화를 주장했습니다. 기업의 사용자와 노동자가 내부 문제를 공동결정하는 방안도 제안했지요. 독일에서 시행 중이던 공동결정제도와 유사합니다. 이는 훗날 노사협의회라는 변형된 형식으로 한국에 정착하게 됩니다. 토지 개혁과 관련해서도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을 한민당 정강에 반영합니다. 요즘은 상식이자 당연시되는 정책들이 당대에는 민족진영 정당에겐 파격이자 획기적인 주장이었죠.”

고하 일대기와 글 모음집 증보판에 추가된 내용을 소개한다면?

“평양 출신 화가로 얼마 전 작고하신 김병기 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은 언젠가 한국방송에서 1945년 8월 해방 이후 조만식 선생과 고하 선생의 인연을 소개하셨어요. 당시는 한반도의 미술계도 온통 좌파가 압도하는 형국이었죠. 그 시절 조만식 선생의 밀명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한 김 전 이사장은 고하에게 조 선생의 밀지를 전달했더군요. 좌우 대립 시기 민족 통합을 고심하던 고하 선생의 역할을 되새기는 계기였습니다. 2003년 작고한 독립운동가 이강훈 전 광복회장이 전한 비화(秘話)도 추가했습니다. 이 전 회장은 고하 선생으로부터 거금의 독립 자금을 수차례 받아 송금하거나 몸소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게 전달한 일화를 공개했지요. 모두 극심한 탄압과 물샐틈 없는 감시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라 변변한 기록이 없었어요. 또 고하는 사형제도 폐지론을 전개했는데 그건 저희도 몰랐던 내용이었어요. 부산에서 형법 교수로 봉직한 어느 학자께서 사형제 폐지를 논한 고하 선생의 글을 제공하셨어요. 이번에 함께 수록하게 됐습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해도 누(累)가 되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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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송상현(윤 대통령 왼쪽 뒤) 서울대 명예교수 등 참석자들이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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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글을 보니 고하 선생은 세계 조류와 대세를 논하면서 물리학 법칙을 가끔 인용했습니다. 이를테면 “급격한 변화는 역사상 실례로 보아서 으레 반동적 기분을 야기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이것은 물리학상으로도 실증할 수가 있다. 급전직하하는 물체가 도리어 공기의 파동을 받아 최후의 요동을 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는 등의 대목이 그렇습니다. 고하가 물리학에도 천착했을까요?

“고하는 동경 유학 시절 [학지광]이라는 유학생 잡지 편집인을 지냈죠. 아주 선진적이고 대담한 글을 연재합니다. 자유 결혼, 과학 진흥 등 구습 타파와 새로운 사상을 담은 주장을 쏟아냈으니까요. 글 모음집인 [거인의 숨결]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지요. 고하는 나라의 미래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당시는 미국에서 백열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이 대대적으로 열리는 등 토머스 에디슨의 명성이 자자할 무렵입니다. 그래서인지 고하는 식민지 시절 국민의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자 안창남 비행사나 엄복동 자전거 선수 등을 초청하여 후원 대회를 열기도 했지요. 또 과학기술계 대표 주자였던 이태규, 리승기 박사를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이태규 박사는 일본 최초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유가와 히데키와 쌍벽을 이룬 과학자였고, 일제강점기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합성 섬유를 만든 리승기 박사는 월북 후 북한의 섬유산업을 이끈 뛰어난 화학자였습니다. 물리학에만 천착했다기보다 과학 진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봅니다.”

고하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의 흉상 거취가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육군사관학교가 2018년 충무관(생도 학습 건물) 중앙 현관에 설치한 홍범도 장군 흉상을 독립기념관 등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자 여야 정치권 공방이 가열되기도 했지요.

“이게 다 역사의 문제이지요. 정확한 팩트를 아는 게 우선이고, 그에 기반한 주장을 펴야 합니다. 얼마 전 방현석 작가의 소설 [범도]를 읽어 봤어요. 픽션이기는 하지만 홍범도 장군께서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초인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하는 장면을 잘 그렸더군요. 그런데 그 뒤에 발생한 자유시 사변 등에 대한 얘기는 거기서 딱 끊겨 끝나고 말아요.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공산주의자가 됐다면 이런 분들을 다 품어 우리 항일독립운동사에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우리가 후손으로서 공로를 기려야 할 책무가 있지요. 반면, 홍 장군이 많은 독립군이 희생된 자유시 사변에 관련됐고, 소련 공산당에 들어가서 레닌에게 돈과 권총을 받고 소련군 대위에 임명됐다는 논란도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반공(反共)의 보루인 육사 교정에 흉상을 둬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더군요. 저는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어서 뭐라고 말씀드릴 순 없지만, 육사와 관련해서는 공산당 가입, 레닌과의 밀접한 관계 등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육사에 생도로 들어간다는 건 언제든지 내 목숨을 나라에 바친다는 뜻이거든요. 이들에게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할 주적은 공산당이므로 그 많은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 중에 이분이 과연 육사 생도들에게 그렇게 귀감이 될까요? 이 문제는 조사를 면밀하게 해보면 좋겠어요. 홍범도 장군이 독립을 위해 희생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하므로 달리 좋은 방법을 마련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독립기념관으로 갈지,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더 좋은 데로 모셔도 크게 누(累)가 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내로남불 분위기,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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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열린 ‘고하 송진우 선생 탄신 133주년 및 서거 78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주요 내빈들이 묵념을 올리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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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과 중공군 군가 작곡가인 중국 귀화인 정율성을 광주광역시가 선양하는 사업을 놓고도 반(反)국가적인 인물이라는 이유로 정율성 기념사업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조금이라도 애를 쓴 게 있다면 우리가 많이 발굴해서 추앙하고 존중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 인민군이나 팔로군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6·25 때 서울까지 내려왔으면 그건 단호히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는 사전에 꼼꼼하게 조사해서 이런 혼란이 안 생기도록 선정 작업을 엄밀히 진행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자유주의를 신봉하잖아요. 그 길로 가려고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되고 그에 필요한 방법이 민주주의지요. 그게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하는 것이죠. 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가짜 뉴스가 들어가면 의사결정이 제대로 될 수 없지요. 이게 가짜 뉴스의 해독(害毒)입니다. 이것만은 꼭 바로잡아줬으면 합니다.”

방법론을 제시한다면?

“가짜 뉴스, 허위 정보들의 제작과 유통을 예방하는 방향으로 조치를 좀 취해야 합니다. 그냥 방치하면 민주적 의사 결정이 불가능하고. 사람들이 점점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로 치닫게 됩니다.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전락하는 것이죠. 그런 사회에선 그 누구라도 통치 자체를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이런 현상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더 심화했다고 생각합니다. 국기 문란, 이념에 따른 국민 분열이 극에 달했죠. 국회, 중앙정부, 지방정부 차원의 부패와 유착도 만연해서 공정, 상식, 정의, 도덕 같은 가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5년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게 법치 아닌가요. 국민이 준수해야 할 기준, 요건, 절차가 분명한 법치 사회일수록 공무원의 재량은 줄어들고,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은 높아져 국민도 편해집니다. 지난 정부는 이런 점에서 반대로 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즘 윤석열 대통령의 이념과 체제 발언의 강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화법으로는 너무 직설적이고 공세적이지 않나요?

“대통령 본인의 분명하게 맺고 끊는 평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야당은 현 정부를 겨냥해 독재 정권이라고 비판하고, 철 지난 이념 공세를 편다고 몰아세워요. 그러나 적어도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의 생존을 위해 누가 적(敵)이며, 누가 동지인지 구별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6·25전쟁이 터지고 1953년 휴전이 된 지 올해로 70년입니다. 동족상잔을 일으킨 공산당이 세계 적화 혁명 야욕을 감추고 있어 나쁜 줄은 모두 다 아는 일인데, 세월이 흘러 전쟁에 대한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지지요. 북한에 대한 경계심도 그만큼 느슨해져 ‘북한도 사람이 사는 동네인데 말하면 다 통하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전 정부에서 오매불망 북에 대고 온갖 평화의 제스처를 다 취했지만 돌아온 건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 폭파밖에 없지 않았나요. 북한의 정체가 뭔지, 중국의 정체가 뭔지, 러시아의 정체가 뭔지 확실히 알아야 하죠. 이것은 남녀노소, 학생, 직장인, 일반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생존의 법칙입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런 ‘방심(放心) 불가’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 아닐까요. 본인은 국제회의에 부지런히 참석해 한국의 안보를 전방위로 챙기는데 국내에서는 손발을 잡아매는 분위기이다 보니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윤 대통령이 말투를 어떻게 가져갔든, 그게 적당하면 적당한 것이고, 부적당하면 부적당한 때가 있을 겁니다. 이 문제는 심플해요. 급격한 문명사적 전환에다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엄혹한 시기에 적과 동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 생존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뜻이겠지요.“



“겸손과 포용은 집권 기간의 기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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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윤 대통령의 디테일은 정치 문법에 맞게 좀 순화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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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일각에서도 대통령이 반대파와 싸우려 든다는 느낌을 주는 건 곤란하지 않으냐는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기술적이고 디테일인데… 그 디테일은 요즈음의 정치 문법에 맞게 좀 순화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요.”

지난 4월 교수님이 등장한 언론 인터뷰 기사 제목이 ‘(윤 대통령이) 더 겸손하면 전화위복 될 것’이었습니다. 5개월이 흐른 지금은 어떠한가요?

“겸손이라는 건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니까 겸손할수록 좋은 겁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가까이할수록 점수를 얻는 사람과 까먹는 사람 말이죠. 윤 대통령은 만나면 만날수록 포인트가 쌓여요. 좋은 점들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죠. 이는 가정교육의 기초가 탄탄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잘 보시면 알아요. 예컨대 공개 행사장에서 국민을 향해 절하는 모습을 한번 보세요. 간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교육을 통해 세련되어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무튼 겸손과 포용은 그분이 집권하는 동안의 기본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송 교수님은 지난해 6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팬덤에 기대지 않는 대통령이라 성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윤 대통령은 성공으로 가고 있나요?

“제가 보기에 윤 대통령은 국정 지지율이 설령 1%로 떨어져도 팬덤에 기대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분이니까요. ‘윤 대통령도 별수 있겠나, 기성 정치에 물들기는 마찬가지겠지’라고 많이 짐작하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으리라 예상합니다. 5년간 국민을 이끌고 자기 소신을 펼쳐나가는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하거나, 금품 수수 의혹을 받는 제자들에 절망”



대선 전과 후의 윤 대통령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말씀이군요.

“자기가 손해 보는 줄도 알아요. 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 기분에 맞게 잘해 주기도 하지만, 적어도 해야 할 말을 지지율이 겁나서 못하는 등의 그런 눈치는 안 보는 분이니까요.”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장기 미제 사건이 3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저는 국제형사재판소장 등을 지내는 등 외국에 자주 나가고 현지에 살기도 했지요.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라 자랑을 침이 마르도록 했어요. 특히 한국 법조인의 우수성, 권력이 더 센 행정부로부터의 사법부의 독립은 모범사례니까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한국만큼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된 나라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호언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가 들어선 뒤로는 제가 입을 다뭅니다. 창피해서 예전같이 말을 할 수 없어요. 사실 대통령을 포함한 5부 요인 상당수, 언론에 언짢게 오르내리는 법조계의 인물들이 거의 저의 (서울대 법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 하는 일이 마뜩잖아도 스승으로서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지요. 되도록 함구해야지 자꾸 이름을 들먹이며 옳으니, 그르니 할 순 없잖아요. 다만 저도 상식을 가진 국민이 갖는 걱정을 똑같이 합니다. 공적인 사안을 두고 거짓말을 하거나, 부적절한 금품을 받은 의혹이 제기되는 제자들을 보면 절망을 금할 수 없더군요.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도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 글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최영재 기자 choi.yeong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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