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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5·18 헌혈차에 총 쏜 공수부대…친구 금희를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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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금희양 고교 동창 문순애씨

“5·18 진압부대, 헌혈차에도 총 쏴”


한겨레

1979년 4월 전남여상(당시 춘태여상)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고 박금희(맨 왼쪽)양과 친구 문순애(가운데)양. 문순애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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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희야, 수학여행 때 경주 불국사 다보탑 앞에서 사진 찍었던 거 생각나? 1979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가 한 반이었잖아. 학교 임원도 함께했고. 7남매의 막내였던 넌 엄마가 양동시장에서 팔 채소를 자전거에 실어 옮겨줄 정도로 씩씩하고 활달했지. 자취하는 친구들한테 반찬과 채소, 된장을 가져다줄 만큼 인정도 많았고. 게다가 노래는 어쩌면 그렇게 잘했던지.

1980년 5월21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도청 앞에서 군인들이 총을 쏴 난리가 났던 날이야. 오후 두세시쯤이었나? 무서워서 방림동 자취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네가 나를 찾아왔었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내가 급히 쌀을 안쳐 밥상을 차렸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네가 ‘집에 가야겠다’고 해 내가 바래다주러 집 밖으로 나왔을 때야.

적십자 마크가 선명한 헌혈차가 우리 앞에 다가왔어. 차에선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절박한 목소리로 방송을 했고. 내가 “헌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자, 넌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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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기독병원 1980년 5월21일 헌혈자 명단에 춘태여상(전남여상) 3학년 박금희의 이름이 보인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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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엔 스무명 정도가 타고 있었을 거야. 시내를 돌며 사람을 모은 헌혈차는 양림동 기독병원으로 갔지. 그런데 병원에 가서는 헌혈을 하지 못했어.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피를 보관할 용기가 부족했거든.

할 수 없이 집에 가려고 헌혈차를 다시 탔어. 버스는 지원동으로 향했는데, 저녁 6시나 7시쯤 됐을까? 헌혈차가 시내버스 종점 앞 큰길을 도는 순간, “따다다닥” 콩 볶는 소리가 났어. 군용 트럭을 탄 군인들이 우리가 탄 차를 향해 총을 쏜 거야. 누군가 “엎드려” 하고 외쳤고, 나는 의자 밑으로 몸을 숨겼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가 탄 헌혈차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었어. 넌 의식을 잃은 채 의자에 엎드려 있었고. 내가 “금희야, 금희야” 불렀지만 넌 반응이 없었지. 총에 맞은 사람은 너를 포함해 모두 세 명이었어.

그길로 바로 헌혈차를 몰아 기독병원으로 갔지. 사람들은 “어떻게 헌혈차에 총을 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어. 넋이 나가버린 나는 산부인과 병동 침대에서 그날 밤을 보냈단다. 그리고 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

그날 이후 한달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 5·18이 끝나고도 난 너희 집을 찾아가지 못했어.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도저히 네 식구들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지. 부모님께 ‘나만 살아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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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수학여행 때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첫 줄 맨 왼쪽이 박금희양이고 뒤에서 둘째 줄 왼쪽 둘째가 문순애씨. 문순애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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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땐 네 생일이 돌아오면 친구들과 네 무덤을 찾아가 파티를 했단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난 교사가 돼 경기도에 정착했어. 광주를 떠난 뒤 너와의 아픈 기억을 한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요즘은 그때 일을 증언하고 있단다. 여러 사람한테 네 이름이 기억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 난 최근 기독병원 5월21일 헌혈자 명단에 너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43년이나 지났는데, 오월만 되면 난 가슴이 시리고 아프단다. 널 죽게 만든 사람들이 사죄도 하지 않고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 화가 나. 그래도 금희야, 아무쪼록 그곳에선 평안하길 바라. 미안해, 금희야. 미안해.

2023년 5월에 친구 순애가

(1980년 5월21일 헌혈을 하러 병원을 찾았다가 귀가 중 계엄군 총격을 받아 숨진 박금희(당시 춘태여상 3학년)양의 친구 문순애씨와 한 인터뷰를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 이 기사에 나온 “그런데 병원에 가서는 헌혈을 하지 못했어”라는 문순애씨 진술과 “난 최근 기독병원 5월21일 헌혈자 명단에 너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라는 내용이 충돌한다는 독자들 지적이 있어 설명드립니다.

문순애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1980년 5월21일 오후 박금희양과 헌혈차를 타고 광주 양림동 기독병원에 갔을 때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피를 보관할 용기가 부족해 헌혈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독병원 5월21일 헌혈자 명단(102명)에는 박금희양 이름이 나옵니다. 이 명단은 ‘대한적십자사 광주적십자 혈액원’이 정리한 기록입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이에 대해 “박금희양이 5월21일 기독병원에서 헌혈한 뒤, 문순애씨의 집에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문순애씨도 “그랬을 수 있겠다”고 수긍했습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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