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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권도형이 몬테네그로에서 잡힌 이유, 비트코인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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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형 vs 김성태

도피 경로 비교해 보니

‘싱가포르 → 두바이 → 세르비아 → 몬테네그로.’

지난해 가상 화폐 루나·테라 폭락 사태로 전 세계 투자자에게 50조원 이상 피해를 준 권도형(32) 테라폼랩스 대표의 현재까지 밝혀진 도피 경로다. 권씨는 지난 23일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 공항에서 코스타리카 위조 여권으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행(行) 비행기에 오르다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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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 공항에서 코스타리카 위조 여권을 갖고 두바이로 출국하려다 체포된 권도형. / 로이터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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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폼랩스 대표와 지난 1월 태국 골프장에서 체포돼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하고 있는 김성태 전 쌍방울 그룹 회장./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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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 언론 비예스티에 따르면, 권씨는 코스타리카 위조 여권에는 본인 이름을, 소지하고 있던 벨기에 위조 여권에는 가명을 사용했다. 출국 심사 직원은 한국 이름이 적힌 여권을 받자 바로 중앙아메리카 코스타리카의 수도 산호세에 있는 인터폴에 연락했다. 그 결과 여권에 적힌 주소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여권도 등록된 것이 아니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현장에서 그와 동행인 한모씨는 노트북 3대와 휴대폰 5대를 압수당하고 구속됐다.

권씨의 도피 행각은 지금까지 있었던 도피자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대부분 우리와 피부색이 비슷해 숨기 쉽고, 환치기(불법 외환 거래)가 쉬운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지난 1월 태국 골프장에서 체포된 ‘쌍방울그룹 비리 의혹’ 핵심인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태국 등 인도차이나 반도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왜 권도형은 한국인에게는 낯선 발칸 반도, 인구 62만명의 동유럽 국가 몬테네그로에서 잡힌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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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력자가 유럽에 있다?

권씨가 두바이로 가기 위해 측근인 한씨와 몬테네그로 공항에서 타려고 했던 비행기는 몰타에 기지를 두고 벨기에인 CEO가 있는 개인 전세기 회사 ‘얼라이언스 제트’다. 암호화폐 전문 언론 DL뉴스에 따르면, 그가 임차한 전용기는 11명까지 탈 수 있고, 4명이 잘 수 있으며, 호화로운 식사를 제공하고, 같은 기종 중 가장 넓은 객실을 갖고 있다. 권씨와 한씨는 이 전용기를 타고 7시간 거리에 있는 두바이로 가려다 체포된 것이다.

권씨는 인터폴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적색 수배 대상자로, 한국 여권이 말소된 상태였다. 그가 타려고 했던 전용기를 누가 예약했는지, 돈은 누가 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용기를 이용하려고 한 정황을 볼 때 그는 자금이 궁핍하지 않으며, 조력자가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그 조력자는 유럽 주변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도 지난 28일 “권씨는 도피 생활 중에도 세계 곳곳에서 VIP 행세를 하며 귀빈 대접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도망자는 누가 도피를 도와주는지, 어떻게 도와주고 있는지에 따라 가는 곳이 달라진다”며 “조력자를 중심으로, 그들의 권유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2) 비자금이 비트코인이라?

권씨가 여느 도망자와 다른 둘째 특징은 비자금 대부분이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이라는 것이다. 지난 2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권씨가 비트코인 1만개를 빼돌려 스위스 은행을 통해 현금화했다고 밝혔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권씨는 테라 생태계의 비트코인 1만개를 암호화폐 거래소가 아닌 콜드월릿(온라인에 연결되지 않은 하드웨어 암호화폐 지갑)에 보관하고 있었다. 권씨는 지난해 5월부터 주기적으로 콜드월릿에서 비트코인을 빼내 스위스 은행을 통해 현금화했으며, 자금 중 일부를 법정 화폐로 인출했다. 이렇게 작년 6월부터 지난 2월까지 스위스 은행에서 인출한 금액은 1억 달러(1300억원) 이상이다. 블록체인 전문가인 조재우 한성대 교수는 “최근 몇 달 동안 권씨의 가상자산 거래 패턴에 변화가 생겼다”며 “장외 또는 중개인을 통해 다른 주소로 돈을 옮기기 시작한 정황이 나타난다. 그가 돈을 인출하는 것을 도와주는 친구나 브로커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도망자들은 대체로 달러 등으로 비자금을 보유하고, 이 돈을 환치기 등을 통해 도피 자금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권씨는 비트코인으로 자금을 보유하고, 스위스 은행을 통해 현금을 마련했다. 암호화폐가 합법화된 나라이면서 스위스와 접근성이 편한 나라일수록 좋은 것이다. 그가 작년 말부터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추정하는 이유다.

세르비아는 2020년 12월 29일 디지털 자산법을 발효하면서 암호화폐 발행 및 거래, 관련 서비스 운영이 공식적으로 합법화된 나라다. 2차 거래 및 장외 거래도 가능할 뿐 아니라, 암호화폐 ATM도 있다. 암호화폐 부자인 그에게 세르비아는 암호화폐 천국이자 자금 유통 천국이었을 것이다.

(3) 세르비아와 두바이에서 복귀 노렸나?

권씨와 함께 체포된 한씨는 테라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차이코퍼레이션의 전(前) 대표다. 차이코퍼레이션의 전 총괄대표인 신현성은 권씨와 함께 테라폼랩스를 창업했다.

권씨와 한씨는 세르비아에서 함께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지난해 10월 12일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구시가지에 ‘초도코이 22(Codokoj22)’라는 회사를 등록했기 때문이다. 인터폴이 권씨에 대해 적색 수배를 내린 지 3주 만이다. 이 회사의 소유주는 권씨. 한씨는 그와 함께 이사로 등록돼 있다. 회사의 주요 업무는 ‘컨설팅’. 두 사람은 법인을 등록할 때 한국 여권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명을 하고 등록 신청서를 낸 것은 베오그라드에 본사를 둔 현지 로펌(Gecic Law)이 대행했다. 자본금은 100세르비아디나르(약 1413원)였다.

이들이 왜 회사를 설립했는지는 밝혀진 게 없다. 돈 세탁 용도일 수도 있고, 복귀를 준비했을 수도 있다. 그는 체포 전 뉴욕타임스와 통화하면서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며 “특정 사업 모델이 아닌 기술 자선 활동”이라고 밝혔는데 이 목적을 가진 회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 세르비아는 암호화폐 사업을 하기 좋은 나라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다음 행선지였던 두바이 역시 마찬가지다. 두바이는 ‘페르시아만의 암호화폐 천국’이라고 한다. 블록체인 기술 전문기업인 블로코 김종환 대표는 “두바이의 경우 비페트롤(석유) 사업 확대와 개혁 개방 정책이 맞물리면서 암호화폐 사업에 관한 상당 부분이 자유롭다”며 “암호화폐를 통한 금융도 최첨단에 있다. 무언가 해볼 충분한 환경이 된다”고 설명했다.

(4) 반도 국가를 통한 자유로운 이동?

그렇다면 왜 세르비아가 아니라 몬테네그로에서 붙잡힌 것일까. 권씨가 세르비아에서 몬테네그로로 간 것은 잡히기 열흘 전쯤으로 추정되지만, 입국 기록은 없다고 한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원래 한 나라였으나 2006년 분리 독립했다. 그러나 국경을 오가는 것은 그리 까다롭지 않다고 한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보스니아, 북마케도니아 등 발칸반도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몬테네그로는 국토 대부분이 산지나 고원이다. 숨어 지내기가 더욱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 검찰은 권씨가 세르비아에 있는 것으로 확인한 후 현지 수사 당국과 공조해 추적하고 있었다고 DL뉴스는 보도했다. 이렇게 조여오는 수사망이 그를 몬테네그로로 넘어가게 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범죄인 인도에 관한 유럽 협약은 맺고 있다.

(5) 권도형에게 동남아는 오히려 위험?

많은 나라에 적이 있는 권씨는 동남아의 좋지 않은 치안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김 전 회장은 한국 수사망만 피하면 되지만, 권씨는 한국과 미국, 싱가포르 수사망을 모두 피해야만 했다. 범죄 피해자도 권씨에게 당한 사람이 국내만 20만명으로 더욱 광범위하다. 드라마 ‘카지노’처럼 동남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권씨와 김 전 회장의 도피 공통점은 첫 출국을 싱가포르로 했다는 것이다. 권씨는 루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지난해 4월 싱가포르로 출국했다. 싱가포르는 테라폼랩스 본사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싱가포르 역시 권씨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자 그는 두바이를 거쳐 세르비아로 향했다. 김 전 회장 역시 쌍방울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기 전인 지난해 5월 싱가포르로 출국했다. 이후 그는 태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 도피자는 대부분 일단 중국이나 홍콩 등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코로나 기간 중국과 홍콩이 빗장을 걸어 잠근 것과 달리, 싱가포르는 문이 열려 있었다. 특히 싱가포르는 한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았고, 조세 회피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반면 김 전 회장이 붙잡힌 태국은 2001년부터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고 있다. 그런데 그는 왜 싱가포르에서 태국으로 넘어갔을까? 전문가들은 “오랜 도피 생활을 하기에 싱가포르는 물가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아무리 도피를 잘해도,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다.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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