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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내 이름을 써도 괜찮아요”…‘미투’ 물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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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마리아 슈라더 <그녀가 말했다>

‘미투’ 촉발한 와인스틴 사건

가십화 않고 사회 관심 일으켜

두 기자의 지난한 취재기 엮어

미디어 역할 돌아보게 하기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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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와인스틴은 수십년간 성폭력 고발자들에게 합의금을 지불했다.”

2017년 10월5일.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이후 세계적으로 #미투(#나도 말한다) 운동을 촉발시킨 한편의 기사가 <뉴욕 타임스>에 게재됐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20년 전 할리우드의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은 애슐리 저드를 페닌슐라 베벌리힐스 호텔로 초대했다. 젊은 여배우는 이것이 업무 미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이후로 기사는 에밀리 네스터, 로런 오코너, 로라 매든 등 와인스틴에게 피해를 입었거나 그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여성들의 이름을 밝히고 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할리우드에서 군림하던 “늙은 공룡”의 성범죄를 고발한다.

트럼프 성비위 고발했지만


이 기사를 쓴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는 “저널리즘의 영향력은 특정성에서 나온다. 즉 이름, 날짜, 증거 그리고 패턴이다”라고 말한다. 두 기자는 약 5개월에 걸쳐 사건을 취재하면서 날짜, 증거, 그리고 범죄 패턴을 확보했다.

하지만 기사 초안에 넣지 못했던 것이 바로 피해자의 실명이었다. 피해자들은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응하더라도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렸으며, 더 심각하게는 법적으로 피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와인스틴 쪽에서 피해자의 입막음을 위해 합의금과 함께 기밀 유지 서약을 강요했던 것이다. 서약 내용에는 가족, 심리상담사, 경찰은 물론 “현존하는, 또는 앞으로 생겨날 그 어떤 언론사”에도 이 문제를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 발행 마지막까지 캔터와 투히는 제보자들의 실명을 싣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사의 공신력과 파급력을 확보하는 길이거니와, 피해자들의 존재에 모자이크를 치지 않고 그들의 발언에 힘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노력은 제보자들의 용감한 결단으로 이어진다. “She said Yes!”(그녀가 좋다고 말했어) 자신의 이름을 넣어도 좋다는 수락의 순간이 이 모든 과정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그렇게 역사적인 기사에 역사적인 이름들이 등장했다.

마리아 슈라더의 <그녀가 말했다>(2022)는 두 기자가 와인스틴 사건에 주목하게 된 순간부터 마지막 기사 송고 버튼을 클릭하기까지, 탐사보도 과정을 정공법으로 따라간다. 그리고 ‘용기를 낸 자의 이름’이 지니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의미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시기. 메건 투히(캐리 멀리건)는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성비위를 고발하는 기사를 쓰고 있다. 투히는 제보자를 만나 실명 인터뷰를 요청하고,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승낙한다.

하지만 기사가 나가자 상황은 투히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간다. 혐오와 배제가 셀링 포인트였던 정치인에게 성비위는 새로울 것이 없는 ‘뉴스’였고, 트럼프는 별 타격도 입지 않은 채 당선된다. 반면 제보자는 각종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 투히도 마찬가지로 보수 언론으로부터 공공연하게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이건 그저 낙인을 찍으려는 함정일 뿐이다) 심지어 “강간한 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는다.

한편, 201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직장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에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해온 조디 캔터(조 카잔)는 온라인을 통해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직장 내 성폭력 고발에 주목하며 이에 관한 실증적인 기사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던 차에 와인스틴을 둘러싼 각종 소문을 접하게 된다.

캔터는 와인스틴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하지만 뚜렷한 제보나 증언이 없는 상태에서 취재는 난관에 부딪친다. 그는 투히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트럼프 기사 이후 겪은 좌절과 산후우울증으로 지쳐 있던 투히는 다시 한번 힘을 내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하기 전 투히는 캔터에게 묻는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아니야? 할리우드 스타들은 이미 목소리가 크잖아.” 캔터는 말한다. “이건 일터에서의 성착취 문제야. 젊은 여성들은 업무적 제안이라고 생각하고 와인스틴의 초대에 응했어.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성폭력이었지.” 그리고 덧붙인다. “유명 연예인조차 이런 일을 겪는다면, 다른 여성들은 어떨까?”

투히와 캔터는 일터에서의 성폭력이 여성 내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인 문제임에 동의한다. 취재가 이어지면서 와인스틴이 뜻대로 조정하려고 했던 이들이 로즈 맥가원이나 애슐리 저드 등 ‘유명인’만이 아니었고, 그 리스트의 길이 역시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게다가 연예계 내 성폭력은 와인스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비호하는 영화산업과 사법체계로까지 이어지는 구조의 문제라는 걸 확인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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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실패 속에서 찾는 변화


#미투를 비롯한 다양한 해시태그 운동들은 조각 난 채 세계에 분산되어 있는 여성들의 경험과 신체를 연결하고 성폭력·성차별처럼 가시화되기 어렵거나 가십화되기 쉬운 의제에 불을 붙여 실천적인 운동을 이끌었다. 그런데 휘발성 강한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기 위해서는 뉴 미디어의 역할만큼이나 레거시 미디어의 역할 역시 중요하다. <그녀가 말했다>는 책임 있는 언론이 오프라인의 해시태그라고 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기사’를 차근차근 짜가는 지난한 과정을 촘촘하게 보여준다.

투히의 좌절에서 시작한 영화는 고발 기사 이후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80여건의 추가 피해가 고발되었고, 와인스틴은 2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며, 전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촉발됐다. 이는 우리가 이미 아는 결말이다.

하지만 정말 ‘알고’ 있을까? 매일의 실패와 좌절이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때로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잊곤 한다. 하지만 미래에 지금 이 시기는 인류 문명사에 완전하진 않더라도 꽤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온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여성들의 목소리, 얼굴, 이름이 안고 있는 가능성을 좀 더 믿어보아도 좋지 않을까.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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