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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화)

이슈 물가와 GDP

"100엔 스시가 사라졌다"…엔화 추락→물가 폭등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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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인플레 현장 ①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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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따라가지 않는 '통화정책 역주행'으로 엔화값이 폭락하면서 '인플레이션 공포'가 일본 열도를 덮치고 있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일본 정부의 정책적 선택이지만 물가 상승이라는 단기 고통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도 일본 경제 구조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불안감이 커지는 모습이다.

특히 주요 7개국(G7)이나 주요 20개국(G20) 등 글로벌 공조체제가 사실상 가동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 긴축 흐름에 역행하는 일부 국가들의 '나 홀로' 정책은 자칫 세계 경제에 또 다른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염려도 나온다. 앞서 영국도 대규모 재정지출이 필요한 감세정책을 발표했다가 글로벌 시장에 파열음을 초래한 바 있다.

일본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 국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더욱 심각해진 원자재값 상승세를 비롯해 32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엔저 상황이 겹쳤다는 점에서 충격파가 클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물가 쇼크'는 일본이 1990년대 이후 30년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의 8월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작년 동월 대비 2.8% 오르며 30년1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 초 0%대를 보이다가 지난 4월부터 5개월째 2%대를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미국 등에 비해서는 크게 낮지만 임금이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체감상 크게 다가온다.

산케이신문이 지난 17~1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물가 상승 영향에 대한 질문에 '매우 힘들어졌다'는 응답이 10%, '다소 힘들어졌다'가 56.2%에 달했다. 이달 초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서도 정부 물가 대응을 묻는 질문에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73%에 이르렀다. 이처럼 민심이 싸늘해지고 있는 것은 물가를 감안한 실질임금이 5개월째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식품·외식기업은 가격 인상을 발표하고 있다. 일본의 유명 소고기 덮밥 체인 업체인 요시노야는 이달 1년여 만에 가격 인상에 나서 덮밥 값을 20엔 안팎 올렸다. 회전초밥 업체 스시로도 1984년 창업 이래 유지하던 '접시당 최저가 100엔' 전략을 이달 포기했다. 한 접시당 최저 가격을 기존 100엔(세금 포함 110엔)에서 5~10엔 인상했다.

아사히맥주는 맥주·위스키 등의 가격을 6~17% 인상했고 이토햄은 햄·소시지 값을 3~30% 높였다. 가격 인상은 식품뿐 아니라 20~30% 오른 전기료·가스비를 비롯해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다이는 울트라맨 인형 등 일부 완구 가격을 5~35%, 오다큐전철은 로망스카의 특급 요금을 높였다.

엔저가 예전처럼 수출 증대나 기업 수익 확대를 가져오지도 못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도쿄상공리서치가 이달 5019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엔저(당시 달러당 143엔)가 경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마이너스'라고 답한 기업은 54.1%에 달했다. '플러스'라는 응답은 2.5%에 불과했다.

오히려 엔저가 긍정적 효과보다 물가 상승이나 무역수지 악화 등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는 '나쁜 엔저'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내수기업 등을 중심으로 엔저가 경영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금융완화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물가가 상승하는 데 비해 임금은 오르지 않아 가계가 힘들어지고 있고 기업도 원가 상승을 판매가에 충분히 전가하지 못해 (기업에) 바람직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며 "(엔저와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서는) 금융완화를 그만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은행이 금융완화를 유지하는 주된 이유는 경기 활성화다. 과도한 국가부채나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 등의 영향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재무성 추산에 따르면 금리가 1% 오를 때 2025년도 원리금 부담이 3조7000억엔가량 늘어난다. 일본의 국채 잔액은 작년 말 기준 1000조엔을 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21년 기준 미국 132.6%인 데 비해 일본은 263.1%에 달한다.

엔화값 추락에 일본 정부는 지난달 24년 만에 '엔 매입·달러 매도' 정책으로 시장 개입에 나섰지만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금융완화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던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조차도 32년 만의 엔저 상황에 대해 19일 "최근의 엔저 진행은 급속하고 일방적이어서 경제에 마이너스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며 "기업의 사업계획 책정을 곤란하게 하는 등 불확실성을 높인다"고 밝혔다.

[도쿄 = 김규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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