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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화)

일제 감시 피한 유관순, ‘여기’서 독립선언서 몰래 인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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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총 근대기독교문화유산답사 현장을 가다

한겨레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새문안교회 역사관에서 5일 서원석 장로(맨왼쪽)가 한교총 류영모 대표회장(가운데)과 새문안교회 담임 이상학 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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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1884년, 언더우드가 1885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이래 한국 개신교는 전세계 개신교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나라를 잃고 일제에 신음하던 시대에 제국주의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 사업에 헌신했음에도, 한국인들의 독립 열망에 눈을 감고 정교분리 원칙을 한국인들에게 강요했다는 점 때문에 헌신적인 선교사들의 삶마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감이 적지 않았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지난 5일부터 3일간 근대기독교문화유산답사를 통해 우리가 잊거나 소홀히 여겼던 초기 선교사들의 삶의 궤적을 상세히 돌아보았다.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 사무총장 신평식 목사, 총신대 허은철 역사교육과 교수가 이번 답사에 동행했다.

대중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뜻밖의 행적은 첫 답사지인 서울 새문안교회에서부터 드러났다. 지방으로 간 선교사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이들이 주로 있는 곳에 정착한 것과, 달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의 정치·외교·교육의 중심지였던 서울 정동에 자리 잡고, 고종 황제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안내를 맡은, 새문안교회 서원석 장로는 “교회에서 고종 황제 탄신 기도회를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조선이 국권을 잃은 뒤 독립 의지를 불태우던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한 암살 위협에 처했을 때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궁궐에서 고종을 지켰다고 한다. 답사 해설을 맡은 총신대 허은철 역사교육과 교수는 “고종을 돌보는 상궁 나인들까지 일제에 의해 매수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누구도 믿기 어려울 때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고종을 지키기 위해 육혈포를 들고 그의 침실 앞에서 불침번을 서고, 식사를 직접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고종은 이 고마움을 잊지 않고 언더우드에게 ‘사인참사검’을 하사했다. 이 사인참사검은 언더우드의 손자 원득한 박사 등 후손들이 언더우드 서거 100돌인 2016년 연세대에 기증해 교내 연세대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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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중구 정동 정동제일교회 관계자들이 3·1 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 등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파이프오르간 뒤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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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가의 한국 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새문안교회 담임 이상학 목사는 “연세대 대학 시절 ‘선교사들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면서 “새문안교회에 와 언더우드 가문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언더우드 3세인 원일한 박사(1917~2004)가 연세대를 이끌면서 대학에서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1980년 광주에서 군부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도 언더우드 4세인 원한광 박사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광주광역시 호남신학대 최흥진 총장은 한교총 답사단에게 캠퍼스 내에 자리한 선교사 묘역이 있는 양림동산을 안내하면서 “5·18당시 언더우드 4세인 원한광 박사 등 선교사들은 광주 밖으로 나가라는 군부의 명을 거부하고 광주를 지켜, 이들 때문에도 광주 폭격을 하기 어려웠고, 저도 당시 원 박사 댁에 피신했다”며 “이후 원 박사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학살을 세계에 알려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고 밝혔다.

아펜젤러에 의해 1887년 세워진 정동제일교회 예배당 강단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이 있는데, 그 파이프오르간 아래 공간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유관순과 동지들은 3·1 운동 당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 좁고 어두운 공간에 숨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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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 유적지에 3·1 운동 당시 일제의 학살 만행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석호필) 선교사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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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교회 강신범 원로목사(오른쪽)가 3·1 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설명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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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단의 다음 행선지는 경기도 화성 제암리였다. 제암리는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29명이 일제 군인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당한 곳이다. 1919년 제암리 주민들은 3월25일 마을 뒷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친 데 이어 같은 달 31일 발안 장터에서 1천명이 모여 태극기를 앞세워 만세를 외쳤다. 4월5일에도 발안장에 모인 교회 청년들과 주민들이 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려 했으나 일제의 무차별 진압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같은 달 15일 제암교회에 15살 이상 마을 남성들을 교회당에 모이도록 했다. 군은 예배가 없는 날 주민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기 위해 모종의 사과를 한다는 핑계를 댔다고 제암리교회 원로 강신범(81) 목사는 전했다.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람이 모이자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고, 문을 뚫고 나온 이들은 총으로 난사했다. 이후 주검은 교회 밖으로 꺼내 짚과 함께 태웠다. 당시 학살로 희생된 주민은 총 23명. 이제 막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들이었다. 일본군은 이웃 마을 고주리에 가서 천도교인 6명도 살해했다.

103년이 지난 제암리 학살 현장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 있었다. 1905년 살림집에서 시작했으나 학살사건 속에 사라졌던 제암교회는 신축과 증·개축을 반복하며 기념비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교회 오른쪽 언덕에는 제암리 학살사건 희생자들의 유해가 큰 봉분 아래 단체로 모셔져 있었다. 강 목사는 “당시 학살로 남편을 잃은 전동례 할머니를 통해 어렴풋했던 학살의 진상을 또렷하게 알게 됐는데, 사건 당시 희생자들의 유해가 마치 한 덩어리처럼 뭉쳐있어서 주검 하나하나를 분리하기가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제암리교회의 만행은 수의학자였던 스코필드(석호필) 선교사에 의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현장엔 스코필드를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스코필드가 이 만행 사실을 세계에 알리자, 선교사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너 나 할 것 없이 현장 조사를 와서 본국 대사관과 본국 언론에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전남 일원에서 선교를 하던 유진벨의 부인은 이곳 현장 조사를 왔다가 교통사고로 별세하기도 했다. 허은철 교수는 “3·1 운동 전까지는 선교사들이 정교분리라는 파송 본국의 명을 따랐으나 그 이후 일제의 만행을 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이들이 있었고, 강압정책을 펼치던 일제의 한반도 식민정책이 유화적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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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마량진성경전래기념관 관계자들이 최초 성경 전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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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단은 영어 성경책이 영국의 함대에서 조선의 조대복 참사에게 처음으로 전해졌던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마량진성경전래지 기념관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영국 함장들이 다른 나라의 경우 예포를 쏘면 대부분이 놀라 자빠지는데, 조선의 관리들만이 엄정한 자세를 유지했다는 역사적 기록들을 전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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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 선교사묘역에서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가 초기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헌신에 대해 눈시울을 적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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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씨병자들이 직접 세워준 선교사 포사이드 공적비 사진이 전주시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에 전시돼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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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 선교사들이 세운 전주 예수병원 언덕에 선교사들이 모토로 삼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영어 문구가 걸려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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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선교사들의 의료선교로 기념비적 업적을 이룬 예수병원 자리에 들어선 전주시 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을 찾았다. 7일 공식개관한 이 기념관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파송된 해리슨과 잉골드를 필두로 한 의료선교사들이 전주 남학교(신흥중고)와 전주 여학교(기전여중고)를 세우고, 전주 예수병원을 중심으로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병들고 죽어가던 사람들을 구제했던 기록들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다. 특히 한센병 환자들을 제 몸처럼 돌보아, 그의 사후 한센병 환자들이 비석을 세워준 예수병원 2대 원장 포사이드의 기념비 사진이 가슴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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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호신대 경내에 있는 선교사묘역에서 관계자들이 초기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활동상을 설명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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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 사랑으로 광주 전남 일대에서 병자들을 돌봤던 서서평의 사진이 양림동산 선교사묘원에 전시돼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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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양림동산에 있는 서서평 선교사의 묘.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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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양림동은 선교사들이 고아와 걸인, 한센 병자, 폐병 환자 등 버려진 사람들을 돌본 곳으로 유명하다. 호신대 교내 양림선교사 묘원엔 대한간호협회 창립자인 서서평 선교사를 비롯, 유진벨, 오웬 등의 흔적이 깊게 배어있다.

허은철 교수는 “일제는 자신들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시킨 것처럼 선전하지만 1908년 사립학교령과 1918년 서당규칙 등을 통해 계량 서당까지 모두 폐쇄해서 조선인들의 우민화를 꾀했으나 선교사들이 곳곳에 남녀학교를 세워 교육을 하고, 병원과 자선기관을 만들어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답사단을 이끈 한교총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는 “100여년 전 서양에선 미지의 땅이었던 한반도에 온 선교사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이 나라와 한국인들을 위해 헌신했는지 알면 알수록 놀랍고 이들의 애국심에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낀다”면서 “이번 답사를 통해, 우리나라를 고국으로 여긴 나라 사랑과 신앙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 선교사들의 삶을 본받아 한국 기독교가 초심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한교총 사무총장 신평식 목사는 “앞으로 한국교회 차원에서 이런 근대기독교문화유산에 대한 순례를 정례화해 한국교회의 초심을 되찾는 계기로 삼을 계획을 공식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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