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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말총 한 올이 작품이 되기까지...홀로서기 하는 저를 닮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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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권위 '로에베 공예상' 대상 정다혜 작가
전통 갓 만들던 말총, 현대적 바구니로 승화
3100대 1 경쟁 뚫고 전 세계 이름 알려
한국일보

올해 로에베 공예상 대상을 수상한 정다혜 작가가 16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말총 공예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빛살 무늬 토기에서 영감을 받은 토기 모양을 말총 공예의 전통 기법으로 제작했다. 김하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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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 가닥인 말총(말의 갈기나 꼬리털)으로 평면이 아닌 입체적 조형물을 빚어낼 수 있다는 점이 말총 공예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가느다란 말총 한 올이 긴 시간을 견디며 엮여 오롯이 혼자 힘으로 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죠."

최근 말총 공예 작품으로 '2022 로에베 공예상' 대상을 수상한 정다혜(33) 작가는 흔히 말하는 '말총 공예 장인'이 아니다. 세계적 권위의 공예상을 수상했으니 수십 년간 말총으로 작품 세계를 펼쳐온 인간 문화재가 아닐까 짐작하기 쉽지만 이제 막 공예계에 이름을 알린 젊은 작가다. 그는 "말총이라는 소재를 접한 건 5년 전"이라며 "공예상 출품작 '성실의 시간(A Time of Sincerity)'이 작가 정신을 담아 만든 나의 첫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정 작가가 수상한 로에베 공예상은 스페인 고급 패션 브랜드 로에베가 현대 공예의 탁월함을 기리기 위해 2016년에 제정한 상이다. 116개국 작가들이 낸 3,100개 작품을 대상으로 30개의 작품을 선정해 한 명의 우승자를 가린다. 그는 "최종 30인에만 들어도 가문의 영광인데 대상을 받아 아직도 얼떨떨하다"며 "방황한 시간이 길었는데 이제 말총 공예에만 전념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조금 안도가 된다"며 웃었다.
한국일보

로예배 공예상 대상을 수상한 정다혜 작가의 작품 '성실의 시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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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작가의 말총 바구니가 심사위원 만창일치로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데는 소재의 힘이 컸다. 말의 갈기나 꼬리털을 일컫는 말총은 자연 섬유 소재지만 목화나 삼베와 달리 털이 빳빳하고 질겨 입체적인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내구력이 강한 데다 은은한 광택이 있어 과거 갓, 노리개 등 공예품의 소재로 많이 사용됐지만 지금은 제주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정 작가는 "말총 공예는 선조들이 500년 이상 향유했던 문화유산이지만 지금은 세라믹이나 목공예, 섬유공예 등 주류 공예에 가려진 비주류"라며 "가장 한국적인 소재의 신선함과 잠재력이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조소를 전공한 정 작가가 말총에 눈을 뜬 건 5년 전. 대학원생 시절 경험 삼아 지원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지역 연계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말총을 만났다고 한다. 더구나 정 작가는 말총의 최대 산지인 제주에서도, 조선시대 최대 말목장인 갑마장이 있었던 '가시리' 마을 출신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전업 작가의 꿈을 접으려던 찰나에 고향에서 귀한 유산을 만났죠. 하루 9시간 이상 앉아 말총 작업에 몰두하면서 단순한 유물 재현이 아니라 현대의 감각을 담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일보

정다혜 작가가 16일 한국일보사에서 조선시대 토시를 재현한 말총 공예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김하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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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만큼 얇고 가벼운 말총을 손으로 정교하게 엮어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행자에 버금가는 시간의 담금질이 필요하다. 그는 "작품 하나를 완성할 때까지 길게는 몇 달이 걸린다"며 "묵묵하게 말총을 엮어 형태를 만들고, 그 자체로 바로 서게 하는 과정이 앞으로도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의 제목 '성실의 시간'은 결국 작가로서 견뎌온 시간이자,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는 다짐인 셈이다.

정 작가의 시간이 향하는 다음 목적지는 모자 공예다. 500년 역사를 지닌 말총 공예의 원류를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라고 한다. 말총이 전통 갓의 소재였던 만큼 모자를 매개로 다양한 형태와 패턴을 시도해보고 싶은 욕심이 크다. "작가로서의 롤 모델은 피카소예요. 말총을 소재로 피카소처럼 죽을 때까지 매번 다른 작품을 선보이고 싶어요."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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