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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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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오마이갓] 경봉 스님의 물음 “뭐가 그리 바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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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통도사 극락암 조실로서 참선수행을 이끌고 대중교화에 힘쓴 경봉 스님. /효림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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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스님이 산길에 앉아 있는데 한 젊은 승려가 지나다 물었답니다. “오는 중[僧]입니까? 가는 중[僧]입니까?” 분명 노스님을 희롱하는 언사였기에 시자(侍者)는 발끈했지요. 그러나 노스님은 태연하게 한 마디했답니다. “나는 쉬고 있는 중이라네.”

멋진 유머로 한방 먹인 이 분은 경봉(鏡峰·1892~1982) 스님입니다.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祖室)을 지낸 한국 현대 불교의 대표적 고승이시지요.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매월 첫째 일요일이면 극락암에서 1000여명 청중을 상대로 법문을 하셨다지요. 스님 법문의 인기 비결은 내용이 쉽고 유머러스하게 불교 가르침의 핵심을 일러줬기 때문이랍니다.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라는 멋진 별명을 붙여준 이도 경봉 스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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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극락암 전경. 영축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절경 속에 자리잡았다. 경봉 스님은 극락암에 선원을 열고 참선수행을 지도했으며 매월 첫째 일요일에는 대중들에게 법문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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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봉 스님의 일화를 모은 책 ‘뭐가 그리 바쁘노’(효림출판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자는 불교 포교잡지인 월간 ‘법공양’ 김현준(69) 발행인입니다. 그는 고교생 때부터 경봉 스님을 찾아뵙고 많은 가르침을 들은 ‘유발(有髮) 상좌’입니다. 김씨는 “경봉 스님께 큰 은혜를 입었고, 스님 생각만 하면 환희심이 일어나 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엮었다”고 했습니다. 마침 올해 경봉 스님의 탄생 130주년, 열반 40주년을 맞아 경봉문도회 스님들의 도움으로 일화를 모았답니다. 70여 편의 일화를 손바닥만한 크기의 173쪽에 담아 들고다니기에도 부담없어 후딱 읽었습니다.

유난히 뜨겁고 비도 많은 올여름입니다. 우화 같기도 한 경봉 스님의 일화를 읽으시면서 잠시나마 더위와 세상 걱정 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에서 던진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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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경봉 스님. 스님은 하루 3시간만 자면서 시계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효림출판사 제공


-다도(茶道)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 스님을 찾아와 차에 대한 지식을 자랑스럽게 말씀드렸다. 말없이 듣고 있던 스님은 한마디 툭 던졌다. “니, 차 몇 잔 마셨노?”

-스님은 평소 이기영(1922~1996) 교수를 한국불교학을 바로 세운 인물로 꼽았다. 1974년 겨울, 이 교수가 스님을 찾아와 절을 하며 인사했다. “바삐 사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스님은 이 교수를 지긋이 바라보다 물었다. “뭐가 그리 바쁘노?”

충격을 받은 이 교수는 제자들에게 이 일화를 전하며 말했다. “내가 바빴던 것은 무엇인가? 너희도 알다시피 써달라는 글 쓰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강연을 하느라, ‘바쁘고 힘들게 산다’고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경봉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일들이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요 바쁜 일이었던가’ 싶더구나. 너희들은 그렇게 살지 말아라.”

◇미래가 궁금하면 절이 아니라 점집에 가라

-스님이 ‘도인(道人)’으로 알려지자 찾아와 자녀 입시, 사업운을 묻는 이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스님은 말했다. “그런 것은 부산 영도다리 밑에 가서 물어라. 거기 점 잘 보는 이들이 많은데, 와 이 극락(암)까지 왔느냐?” 스님은 서울 사람에겐 ‘미아리 고개’, 대구 사람에겐 ‘달성공원 앞’으로 가라고 했다. 스님의 뜻은 이런 것이다. “미래를 점치거나 운명을 미리 알려고 하는 것에 헛된 노력을 쏟지 말아라. 사람들의 갈등과 회의는 대부분 바른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바른 법을 따르면서 길을 찾으면 나아가야 할 앞길이 보이고, 반드시 잘되게 되어 있다. 정법(正法)과 정도(正道). 이것이 미래를 참되게 개척하는 방법이다.”

◇폐 끼치지 말라

-바깥 일을 보다보면 저녁 늦게 절이나 신도 집에 도착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스님은 나이 어린 시자에게 “야야, 저녁 먹었느냐고 물어보면 꼭 먹었다고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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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이 산책 중 쉬고 있다. /효림출판사 제공


◇과자 들고 선방(禪房) 찾아간 노스님

-스님은 80대 고령이 되어서도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을 격려했다. 잠을 깨워주기 위해서 밤새 헛기침을 하거나 한밤중에 과자 봉지를 들고 선방(禪房)으로 찾아가서 과자를 건네며 간단한 선문답(禪問答)과 격려의 말씀을 들려줬다. “바보가 되거라. 사람 노릇 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 데서 참사람이 나온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 치고 공부해라. 사람 노릇한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시비하고 인사하고 세상 잡사에 시달리면 공부 못 한다.”

-스님은 안거(安居·석달간의 집중 수행)가 끝나고 걸망 메고 떠나는 수행자들에게 물었다. “이번 철 밥값은 했느냐?” “” “이 극락(선원)의 문을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다. 돌부리에 채여서 자빠지지 말고, 물에 빠져서 옷을 버리지도 말고 잘 가거라.”

◇살아있는 부처가 먼저 먹어야지

-한번은 나이 어린 스님이 경봉 스님께 들어온 꿀과 재(齋)를 위해 준비한 과일을 스님들에게 다 나눠줘버린 일이 있었다. 난리가 났지만 전후 사정을 들은 스님의 한마디. “조용히 해라. 살아있는 부처가 먼저 먹어야지.”

◇숫돌로 살지 말라.

-스님은 사교나 명예 등 바깥일에 열정을 쏟는 사람을 보곤 “숫돌과 같이 사는구나” 말씀하셨다. “얼핏 보면 숫돌 같은 삶이 좋은 듯하지마는, 숫돌에는 김 서방이 와서 칼을 갈아 가고, 박 서방이 와서 낫을 갈아 간다. 숫돌처럼만 살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꼭 명심해라.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본들 반 푼어치의 가치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分錢)”

◇휴급소·해우소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오줌이 마려우면 소변부터 보아야지 별수가 있나. 그래서 소변소에서 급한 마음을 쉬어가라는 뜻으로 ‘휴급소(休急所)’라 하였다. 대·소변 보는 일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지 모르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여기에 인생의 큰일과 근본 문제와 생사 문제가 달려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마음만은 쉬어가라. 정말 급한 것은 내 주인공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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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 일화집 '뭐가 그리 바쁘노' 표지./효림출판사 제공


◇근심걱정은 죽은 생각

-”가만히 돌이켜보라. 부모 태중에서 나올 때 영감을 업고 나왔나? 아내를 안고 나왔나? 자식들을 데리고 나왔나? 재물을 갖고 나왔나? 빈몸 빈손으로 나왔는데, 이것들에 애착이 붙어서 놓으려고 해도 놓을 수가 없다. 또 놓을 수 없으니 밤낮없이 걱정을 한다. 그까짓 근심걱정은 냄새나고 죽은 생각이다. 죽은 생각인 근심걱정을 초월하여, 명랑하고 활달하고 낙천적인 정신으로 살아가면, 다시 행복과 성공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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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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