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한적한 리조트 도시지만 이 기간만큼은 축제 분위기였다. 세계 정상은 물론 다국적 기업 CEO, 국제 NGO 단체 대표, 유니콘 스타트업 창업자 등이 대거 몰리는 통에 거리 곳곳은 차량이 정체되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IBM, 메타,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 전시관도 거리를 가득 메웠다. 흡사 국제 엑스포나 CES를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트렌드는 블록체인 기업의 부상이었다. 폴카닷, 폴리곤, 서클, 파일코인 등 주요 블록체인 기업 전시관이 다보스포럼 회의장을 빠져나와 시내를 관통하는 핵심 지구 건물의 절반 이상을 채웠다. 이들 업체는 홍보 전시관 운영은 물론 각종 콘퍼런스, 강연 등을 개최하고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하며 큰 관심을 모았다. 다보스포럼 당시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루나,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UST 등을 두고 ‘피라미드 사기’라고 규정하자 전 세계 언론이 각 블록체인 기업 전시관을 방문, 관련 입장을 청취하는 등 블록체인 자체가 주요 테마로 떠오르기도 했다. 최신 블록체인 업계 화두는 무엇일까.
우크라이나 전쟁 참상 전시관은 옛 ‘러시안 하우스’를 우크라이나 독지가가 매입, ‘러시안 전쟁범죄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달아 눈길을 끌었다. (박수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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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중앙화의 역설
▷코인 발행사만 일확천금, 불만 속출
블록체인 업계는 종전 오피니언 리더가 주도하는 중앙집권 성격의 경제 체제를 탈중앙화, 분산 경제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가 나온 이유도 중앙은행 통제 아래 운영되는 전통 화폐 시스템이 글로벌 금융위기 등에 취약점을 드러냈기 때문에 나온 대안 화폐라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번 루나 사태 이후 ‘탈중앙화가 정말 맞느냐?’는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미국 마이애미 기반 블록체인 데이터 업체 크립토퀀트의 주기영 대표는 “탈중앙화는 종전 주류 금융권의 한계를 지적하며 대안으로 새로운 블록체인 생태계를 만들고자 하는 철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하지만 많은 암호화폐 발행사들은 초기 투자자를 최대한 많이 끌어 모아 암호화폐를 사게 만든 후 자기들만 큰돈을 벌었다. ICO(거래소 등재) 이후 백서 이행이나 사후 책임도 외면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블록체인 생태계가 전반적으로 비판받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른바 ‘탈중앙화의 역설’인 셈이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구겐하임인베스트먼트의 스콧 마이너드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이번 다보스포럼에서 “암호화폐가 가치 저장 수단, 교환 수단, 거래 단위라는 통화의 3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며 비트코인은 8000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예상하기도 했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블록체인허브 다보스 2022’ 행사에서는 NFT, 암호화폐의 미래에 대해 각계 전문가의 논의가 줄을 이었다. (박수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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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커뮤니티 매니저’ 新직업 부상
▷“가입하고 싶다” 욕구 채워줄 인재 절실
“요즘 새로운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고려할 때 경영진이 어떤 사람이냐를 보는 것과 동시에 그 프로젝트의 커뮤니티를 잘 관리할 수 있느냐를 동시에 본다. 특히 중요한 인물이 커뮤니티 매니저다. 매니저 역량이 곧 프로젝트 성패를 좌우할 수 있기에 주요 투자 포인트 중 하나다.”
블록체인 전문 투자사 사슨펀드(SARSON FUNDS)의 존 사슨 대표 얘기다. 우리로 치면 ‘네이버카페 운영자’나 예전 ‘시삽’ 역할을 했던 이들이 지금 블록체인 생태계에서는 ‘블루칩’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BAYC’, 크립토펑크 등이 주도한 NFT 발행 성공 공식도 이와 무관치 않다. BAYC는 어찌 보면 다양한 버전의 네모난 원숭이 그림 디지털 파일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소유한 이들끼리 온라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이 NFT가 있어야 온라인상에서 자랑할 수 있고 그들만의 파티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특권과 혜택이 주어지는 커뮤니티를 기획 단계에서부터 만들었던 것이 단기간 내 펀딩을 하고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동인이 됐다. 그래서 가상자산이나 NFT 후발 주자들은 아예 할리우드 출신의 작가, PD처럼 스토리텔링에 강하거나 모바일 게임 기획자, 소셜미디어(SNS) 인플루언서 출신을 커뮤니티 매니저 영입 1순위로 놓고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고 있다.
▶3. ‘위변조 어렵다’더니 해킹은?
▷오픈씨, BAYC 잇따른 보안사고
‘위변조에 강하다.’
블록체인의 장점 중 하나다. 분산원장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그런데 요즘 NFT 해킹, 위변조 사례가 줄을 잇는다. 세계 최대 규모 NFT 거래소인 오픈씨가 해킹 피해를 입었는가 하면 대표적인 NFT 프로젝트 그룹인 ‘BAYC’ 역시 해킹 몸살을 앓고 있다. 해커들은 NFT 자체를 위변조하려는 게 아니다. NFT 소유 회사나 소유한 사람이 깜빡 속을 피싱 프로그램을 깔아 비밀 암호를 알아내 해당 소유권을 탈취하는 방법을 쓴다.
또 다른 신종 사기도 등장했다.
시중에 유명한 NFT의 원본은 건드리지 않고 이를 소개하는 보도 자료용이나 신문, 인터넷 매체 등에 소개된 디지털 파일을 캡처, 이를 다시 민팅(NFT로 변환)해 원본인 양 팔아 치우는 방식이다. 이런 불안감이 확산된 탓인지 NFT 거래량은 지난해 9월 하루 평균 22만5000건이었던 것이 올해 5월에는 1만9000건으로 90% 넘게 급감(월스트리트저널 자료)하기도 했다.
최근 다보스에서 열린 ‘블록체인허브 다보스 2022’에서도 보안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포럼 주최사 캐스퍼랩스의 므리날 마노하 대표는 “NFT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보안도 계속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원본’을 보장해준다는 개념이 무너지면 시장도 위축될 수밖에 없는 만큼 소유권을 강화할 수 있는 가상자산 지갑의 발전, NFT 구입, 보관 과정에서의 ‘원본’, 이력 여부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 등이 더욱 갖춰져야 이 시장이 성장 가도를 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100억원 투자 유치에 성공한 가상자산 지갑 개발 회사 로똔다의 신민철 대표는 “최근 웹3 논쟁이나 블록체인 디바이드(기술 이해도가 낮아 생기는 격차)를 보면 관련 기술을 이용하는데 ‘불편하고, 어렵고, 불친절하다’는 평가가 많다. ‘브리또’라는 차세대 범용 블록체인 지갑 개발을 하겠다고 하자 국내외에서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곳곳서 밝히는 이유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4. 블록체인, 사회 공헌 기여
▷우크라이나 지원에 암호화폐 활용 각광
이번 다보스포럼 기간 중 가장 큰 테마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했는가 하면 다보스 시내 곳곳에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바라는 현수막과 전생 참상을 알리는 전시관이 선보였다.
특히 가상화폐로 우크라이나를 돕는 모금 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면서 블록체인 기술의 밝은 면이 부각되기도 했다. 미국 자선단체 피델리티채리터블의 암호화폐 모금액은 지난해 1억5000만달러(약 1700억원)에 달했다. 최근 국제구호기구 유니세프, 아프가니스탄 최대 여성 인권단체 ‘우먼포아프간우먼(WAW)’ 등도 자체 NFT 작품을 발행, 판매대금을 구호 활동에 쓰기도 했다.
글로벌 벤처캐피털 회사 투비루의 박승은 이사는 “암호화폐의 부정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고 있지만 금융 인프라가 취약한 지역의 사회 문제 해결, 평화 기원 용도의 모금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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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규제 논의 “오히려 반갑다”
▷제도권 편입되면 소비자 보호 강화
테라, 루나 사태 이후 각국 정부는 스테이블코인뿐 아니라 가상자산, 알트코인 전반에 대해 소비자 보호 등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예전만 해도 이는 가상자산 시장에 악재였다. 정부 개입이 들어가면 시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다르다. 오히려 각국 정부가 개입해서 소비자 보호에 적극 나서고 소위 ‘고래(대량 가상자산 보유자)’가 시장 왜곡을 하지 않도록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신민철 대표는 “무조건 규제가 해악은 아니다. 제도권 내 편입시켜서 주류 금융상품, 파생상품이 금융소비자, 시장을 무서워하면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블록체인 생태계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 마이클 초바니안((Michael Chobanian) 우크라이나 블록체인협회장
블록체인 기술이 평화 부르리라 확신
올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 정부와 민간 단체는 힘을 모아 암호화폐 모금활동에 나섰다. 전쟁물자 마련은 물론 국가 재건을 위해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에서 호응을 얻은 이 모금 활동은 석 달 만에 약 7000만달러 규모를 넘어섰다. 국제 모금 활동을 주도한 민간인 중 한 사람이 마이클 초바니안((Michael Chobanian) 우크라이나 블록체인협회장이다. 우크라이나 가상자산 거래소 ‘쿠나(Kuna)’ 창업자이기도 한 그를 다보스에 임시로 설치된 우크라이나 전쟁 참상 전시관에서 직접 만났다.
Q 전시관에 소개된 사진, 영상들을 보니 참혹하다.
A 실제로는 더 심각하다. 주변에 많은 지인이 직간접적으로 연계돼 있고 실제로 고통받고 있다. 물이며 전기 등 기본 인프라 시설이 파괴돼 어려움도 많다. 당연히 금융 거래 등도 쉽지 않다. 국제 사회에 이런 참상을 알리고 또 힘을 얻기 위해 정부는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할 일을 해보자고 해서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모금 활동도 그 일환이다.
Q 이번 다보스 내 전시관 이름이 특이하다.
A 원래는 러시안하우스(Russian House)였다. 실제 러시아인 소유였고 러시아 사람들로 북적인 곳이다. 이를 우크라이나 경제인이 구입, 간판을 바꿔 달았다. ‘러시안’과 ‘하우스’ 사이에 ‘warcrimes(전쟁범죄)’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이번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전 세계 언론에 전파되는 등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 이런 일련의 활동 역시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업인들이 적극 나설 수밖에 없다.
Q 암호화폐 모금을 기획하게 된 이유는.
A 블록체인 기술 덕분이다. 많은 이가 실제 투자하고 있고 전 세계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블록체인 지갑을 통해 송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방법을 고안했다. 반응은 폭발적이다. 정부 입장에서도 고무적인 성과로 보고 있다.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향후 가상자산 기반 예적금, 대출 등을 할 수 있는 제도권 은행 설립 등 적극적인 규제 혁신도 계획하고 있다. 비자나 마스터카드로도 암호화폐를 살 수 있는 인프라도 구축하고 있다.
Q 블록체인 기술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나.
A 그렇다. 기술 우위, 경제력 우위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우선은 전쟁이 끝나야 한다. 이번 전쟁을 통해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점은 경제력이다. 스위스만 봐도 경제력이 뒷받침되니까 영세중립국 지위를 얻으면서 강소국으로 자리 잡았다. 우크라이나가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경제력이 국력’이다.
[박수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2호 (2022.06.08~2022.06.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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