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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경찰 숨지게 한 5·18 유공자, 42년만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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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현장서 버스 몰았던 운전사, 도청 앞으로 돌진해 4명 순직

순직 경찰 유족들 “가족 잃고도 죄인인듯 살았다”

조선일보

당신을 용서합니다 -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를 막으려는 경찰들을 향해 버스를 돌진시켰던 배모(77·왼쪽)씨가 당시 버스에 부딪혀 숨진 고(故) 정충길 경사의 아들 정원영씨와 끌어안고 있다. 이날 배씨는 42년 만에 당시 숨진 경찰 유족들에게 사과를 했다. 유족들 역시 5·18의 피해자였다. 이날 이들은 “‘경찰이 광주시민을 다 죽였다’고 하니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죄인이 되어 평생 땅만 보고 살았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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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0일 밤 전남도청(현 광주광역시 5·18민주광장) 앞. 시위대의 도청 진입을 막으려고 대형을 갖추고 선 경찰 수십 명을 향해 버스 한 대가 돌진했다. “피하라”는 소리에 경찰 대부분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미처 버스를 피하지 못한 경찰 4명은 버스에 깔려 숨졌다. 당시 버스 운전사였던 배모(77)씨는 이 일이 벌어진 뒤 버스에서 내려 달아났다.

사망한 경찰 유족들은 40년 넘게 크게 소리 내 울지도 못했다고 한다.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숨지거나 다친 피해자가 많았지만, 이들 역시 5·18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이들과 그 가족 상당수는 줄곧 가해자로 분류돼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민간인 피해에 대해선 진상 규명과 배상이 꾸준히 이뤄졌지만, 윗선 지시로 진압에 참여했던 군과 경찰이 입은 피해는 상대적으로 등한시돼 왔다. 배씨 역시 사건 직후 체포돼 사형이 확정됐지만 2년여를 복역한 후 풀려났고 특별사면을 받았다. 또 5·18민주유공자 인정도 받았다.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당시 숨진 경찰관 유족들은 버스를 몰았던 배씨에게 사과를 받았다. 42년 만이었다. 유족들은 “우리 아버님들의 죽음도 5월 영령들과 동일한 희생이고 죽음이고 아픔이었다고 당신이 말해달라”고 했다. 배씨는 머리 숙여 사과했고, 유족들은 그에게 “용서한다”고 했다.

이날 오전 10시쯤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경찰묘역. 백발의 배씨는 충혈된 눈으로 250~253번 묘지 앞에 서 국화꽃을 내려놓고 차례로 묵념을 했다. 이곳은 1980년 5월 20일 밤 배씨가 버스를 몰고 경찰을 향해 돌진하는 바람에 사망한 경찰 4명이 안장된 곳이다. 함평경찰서 소속 고(故) 정충길 경사, 이세홍 경장, 박기웅 경장, 강정웅 경장이다.

묘지 앞에 선 배씨의 모습을 곁에서 보던 정 경사의 아내 박덕님(81)씨는 연신 소리 내 울었다. 지팡이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묘지 앞을 떠나지 못했다. 배씨는 “그 (사건) 현장을 꿈에라도 한번 꿔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 것은 도저히 (꿈에) 나오지 않더라”며 “무조건 유족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이후에도 “죄송하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조선일보

2022년 5월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에서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버스 돌진 사고로 순직한 함평경찰서 경찰 유가족과 사건 당사자간 사과와 화해 시간 마련 행사가 열렸다. 운전기사 배 모씨가 순직 경찰 유가족의 손을 잡고 사과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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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순직 경찰 4명 중 박 경장의 유족들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다른 순직 경찰 3명의 유족들은 차례로 침통한 모습으로 배씨와 손을 맞잡았다. 숨진 정 경사의 아들이자 유족 대표로 나선 정원영씨는 “우리가 그를 만나기 쉽지 않았듯 그도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용기에 응할 뿐”이라며 “당신의 잘못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간 우리 어머니들의 삶은 너무 서러웠다. 우리 자녀들의 삶은 너무 아팠다”고 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 따르면, 5·18 당시 민간인에 의해 경찰이 사망한 경우는 이 사건이 유일하다. 조사위 관계자는 “작년 초 경찰관의 피해를 조사하며 만난 유족들이 ‘가해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고, 가해자인 배씨 역시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와 행사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사건 후 특별사면을 받고 5·18민주유공자도 된 배씨와 달리, 배씨의 차에 깔려 숨진 경찰 유족들은 “지금껏 숨다시피 하며 지냈다”고 했다.

순직한 정 경사 아내 박씨는 “젊은 남편이 광주에서 죽은 것도 억울한데 ‘경찰이 광주시민을 다 죽였다’고 하니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죄인이 되어 평생 땅만 보고 살았다”며 흐느꼈다. 유족들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긴 했지만 매월 3만∼4만원 정도 남짓한 연금 이외에 아무런 보상이 없었고, 일반 시민 위주인 5·18 관련 단체들에서 외면받았다고 했다. 조사위는 ‘5·18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개정되며 작년에서야 민간인이 아닌 군과 경찰의 사망·상해 등 피해 조사를 시작했다. 반면 5·18민주유공자로 지정된 사람들에게는 그간 7차례에 걸쳐 총 2510억원(5807건)의 보상이 이뤄졌다. 정원영 대표는 “정부도, 5월 당사자 단체들도 죽은 듯 있으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은 삶을 살았다”며 “5·18 관련 민간인 희생자들이 국가 보상을 받은 것처럼 경찰 유족들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도록 명예 회복의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사위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인과 경찰의 피해 사실에 대한 조사를 추후에도 이어나갈 예정”이라며 “유가족의 아픔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유가족들의 어려웠던 삶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통해 이들의 요구 사항을 국가에 건의할 것”이라고 했다.

[강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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