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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구십평생 어린이 건강 보살펴온 아버지가 우리의 스승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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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소아과 의사 정우갑 박사 ‘구순’

딸 일곱자매 회고록·전시회 ‘헌정’

“알츠하이머 더 나빠지시기 전에”

여성운동가 오한숙희씨 ‘0번딸’

임권택 감독 “가장 존경하는 형”


한겨레

이산 정우갑 박사와 일곱명의 딸. 앞줄 왼쪽부터 셋째 진옥, 아버지 정우갑, 둘째 진주. 뒷줄 왼쪽부터 여섯째 진영, 첫째 진화, 일곱째 막내 진선, 넷째 진경, 다섯째 진남씨. 사진 갤러리―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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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 기념으로 회고록을 헌정받고,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는 전시회까지 선물로 받는다면 분명 성공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5일 누구보다 행복한 ‘스승의 날’을 맞은 원로 소아과 의사 정우갑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날 특별한 선물을 마련한 이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그의 자녀 ‘칠공주’였다.

“애초 2010년 팔순 앞두고 회고록을 내기로 했는데, 어머니(박계숙)께서 뇌출혈로 쓰러져 6년 넘게 투병하시다 2020년에 먼저 떠나셨어요. 그나마 2019년 결혼 60돌 기념일에 회혼식을 올려드려 다행이었죠. 이번에 책과 전시를 준비하면서, 새삼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 건강을 위해 평생을 살아 온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의 인생 스승이었음을 깨달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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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_다 제공


이날 ‘이산 정우갑 박사 회고록 <애들아, 안녕?> 출간과 <일곱 딸 아버지의 슬기로운 의사생활> 전시회’ 축하연을 총지휘한 맏딸 정진화(62)씨의 말이다. 전시 장소인 경기도 하남시 미사역 근처 ‘갤러리_다’를 함께 운영하는 넷째 진경(56)씨와 여섯째 진영(53)씨는 “가족을 비롯해서 제자, 친구, 친척, 학회, 후원 단체 등 구십평생 굽이굽이에서 함께해온 인연과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더 늦기 전에 선물해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더 늦기 전에’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부친 정 박사의 기억력이 다 사라지기 전을 뜻한다. “금슬 좋기로 소문났던 어머니가 먼저 가신 뒤로, 함께 사는 맏딸 이름만 아실 뿐 다른 가족들 이름은 기억을 못하세요.”

그나마 20년 전부터 서서히 진행한 덕분에 정 박사는 여전히 일상 생활을 무리없이 하고 있고, 이날도 취미로 즐겨운 바이올린 연주와 수련의 시절 선친이 선물해준 청진기로 하객들을 진단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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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5일 회고록 출판 기념전에서 정우갑 박사가 바이올린을 연주해보이고 있다. 갤러리_다 제공


1932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정 박사는 위로 세 형이 모두 홍역으로 일찍 숨져 장남이 됐다. 초등 2학년 때 광주로 이사 와 서중 6년을 거쳐 1950년 광주의과대학(전남대 의대 전신)에 입학했다. 곧바로 한국전쟁이 터져 군의관으로 7년간 복무한 그는 1963년 전대 의대 부속병원 소아과 전공의로 부임했다. 1970년 의학박사 학위를 따고 전대 의대 조교수가 된 그는 1971년말 중대부속 한강성심병원 소아과 과장이 되어 1997년 강남성심병원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 퇴직하던 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 참여해 북한 어린이 의약품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이후 홍익병원 소아과 과장으로 옮긴 그는 1998년 대장암 수술을 한 뒤 2005년 알츠하이머 발병 때까지 요셉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맏딸 진화씨의 고교 동창으로 내내 인연을 맺어 ‘0번째 딸’을 자저한 여성운동가 오한숙희씨는 이날 축하연에서도 사회를 맡아 정 박사와 추억을 소개했다.

“1959년 결혼한 이래 72년까지 내리 딸만 일곱을 두셨으니 한편에선 딸부자로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아들을 낳고자 계속 출산을 하지 않았느냐고들 놀리기도 했죠. 지난 1992년 회갑기념 논문집 출간기념회 때도 행사를 진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나는 딸이냐, 아들이냐, 고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아이를 웰컴(환영)했습니다. 내 품에 와 준 귀중한 생명이니까요.’ 존경을 넘어 경외심을 느낀 순간이었어요.”

실제로 회고록 머리말에서 일곱자매는 “손바느질과 재봉질과 요리와 등산까지 가르쳐주신, 한없이 따뜻한 아버지”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세째딸 진옥(57)씨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아버지는 ‘부지런하시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어서 늘 그런 삶의 자세를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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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5일 회고록 출판 기념전에서 정우갑 박사와 사위 4명이 함께했다. 맏사위는 작고했고 다른 2명은 다른 일정으로 이날 참석하지 못했다. 갤러리_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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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4일 회고록 출판 기념전 개막에 앞서 정우갑(앞줄 왼쪽 둘째) 박사가 맏손주인 황영일(맨왼쪽)씨 부부와 증손녀들과 함께 축하하고 있다. 갤러리_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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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5일 회고록 출판 기념전에서 정우갑(맨 앞) 박사가 큰딸 진화(맨 왼쪽)씨의 고교 동창들과 함께했다. 오한숙희(뒷줄 왼쪽 세번째)씨가 이날 사회를 맡았다. 갤러리_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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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딸 진화씨는 전교조 위원장을 지낸 뒤 평화마을짓자 이사장을 맡아 교육운동과 평화운동을 하고 있고, 둘째 진주씨는 근로복지공단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셋째 진옥씨는 미술 등 예술과 종교 활동을, 다섯째 진남씨는 초등학교 교사를, 막내 진선(50)씨는 동시 작가와 어린이책읽기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회고록에서 정 박사와 6촌 사이로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임권택 감독은 “내가 영화를 하고 살든, 아님 다른 뭐를 하고 살았든 아마도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 형님일 것이다. 그런 인간이 내 근처에 한 분이 있다는 것이 나한테는 큰 위안이다”고 적었다.

전시는 오는 25일까지 열리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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