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인천 을왕리 해변 근처 집필실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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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백세 철학자 김형석(1920~)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방 강연을 위해 김포공항에 간 때였다. 탑승권을 받는데 표에 오류가 생겼다고 했다. 공항 직원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겨보다가 김 교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민등록증 사진과 대조해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이를 물은 것이었다.
“백한 살이에요.”
김 교수가 답했다. 그러자 공항 직원은 “컴퓨터에는 한 살로 되어 있다”며 비시시 웃었다. 그 컴퓨터에는 세 자리 숫자인 100이 입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세브란스병원 한 원목의 장모가 106세가 되었을 때 주민센터에서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라”는 통지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한다.
백세 철학자는 이런 해프닝 끝에 받은 탑승권을 공항 라운지에 앉아 다시 살펴 보았다. 그때까지 930회 비행기를 탔고 82만6000마일 이상 비행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공항 직원이 이상하게 여길 만했다. 한 살짜리 어린애가 930회나 구름 위로 날 수는 없으니까.
김형석 교수가 펴낸 에세이집 ‘우리, 행복합시다’(김영사)에 등장하는 일화다. 이 책은 행복, 나이듦, 그리움, 일상 등을 주제로 쓴 글 48편을 묶었다. ‘102세, 긴 삶의 여정 뒤에 기록한 단상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920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한 세기를 지나온 철학자는 “90을 넘기면서부터 ‘나를 사랑해준 분들을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며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머문다”고 썼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강연과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김형석 에세이집 '우리, 행복합시다'(김영사). 백세 철학자의 일상과 인생 이야기,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에 대한 글들을 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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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에 연재된 ‘백세일기’에 언젠가 소개된 적이 있는 글이지만 신년 벽두에 읽으니 새삼 반가웠다. 세 자리 숫자가 입력되지 않는 바람에 백세를 넘긴 노인을 아이로 착각한 항공사 시스템이 고마울 정도였다. 김 교수는 공항에서 그 일을 겪으며 한바탕 웃고 백세 젊어진 기분으로 강연을 하고 원고를 썼을 것이다.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까, 부질없는 상상도 해 보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다시 1월 1일, 리셋(reset·초기화)이 되었다. 해넘이는 기회이자 선물이다. 헬스클럽과 외국어 학원이 바빠질 테고 세무서는 사업자 등록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일 것이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저마다 ‘더 나은 나’가 되려는 시도다. 신년을 둘러싼 에너지를 좋은 쪽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김형석 교수처럼 100살을 넘기면 다시 한 살이 되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줄은 몰랐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소설 ‘웃음’에서 인생의 구간별 자랑거리를 꼽은 적이 있다. “2세 때는 똥오줌을 가리는 게 자랑거리다. 3세 때는 이가 나는 게 자랑거리, 12세 때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자랑거리, 18세 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20세 때는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35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다.”
그런데 더 살면 자랑거리가 뒤집힌다. 마라톤에 빗대면 반환점을 돌아 거꾸로 달린다고 해야 하나. “60세 때는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0세 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 75세 때는 친구들이 남아 있다는 게 자랑거리, 80세 때는 이가 남아 있다는 게 자랑거리, 85세 때는 똥오줌을 가릴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라고 작가는 썼다.
삶은 역시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 모양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똥오줌 가리는 것부터 배우고 인생의 마디마디를 통과하며 자랑스러워 하다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는 다시 똥오줌 가리는 게 어렵다. 삶을 단순화하면 조금씩 죽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비관할 필요는 없다. 결국 죽어 먼지가 될 텐데 뭘 그리 전전긍긍하나. 김형석 교수는 “인생의 마라톤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늙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하고 있다. 백세 철학자의 신간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선물 받은 것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김형석의 100세 일기' 전반부는 2020년 '백세일기'로 출간되었다. 이번에는 그 후반부 글들과 발표되지 않은 글을 모아 '우리, 행복합시다'를 펴냈다. 김 교수는 "독자 여러분의 사랑으로 저는 행복했다. 여러분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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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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