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서구에 한국 문화 알린 선구자
이미륵·김재원·배운성
1933년 독일 잡지 ‘데어 벨트-슈피겔’에 실린 배운성의 ‘한국의 아기’. 돌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은 배운성의 조카 배정길을 그린 그림이다.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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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의 세계 진출이 연일 화제다. K팝, K영화, K드라마가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사회를 휩쓸고 있다. 지구상에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K미술도 조금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수 미술관이 한국 작가의 작품을 컬렉션 하는 것은 예삿일이 되었다. 내년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V&A) 미술관에서는 ‘한류(Hallyu)’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는 최고 블록버스터 전시로 ‘한국근대미술’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코리아’라는 나라 이름도 제대로 알릴 수 없었던 과거와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초라한 시대에도 꿋꿋하게 서구 사회에 진출해, 한국의 존재와 문화를 알린 초창기 선구자들이 있었다.
◇압록강 건너 뮌헨으로 간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본명 이의경·1899~1950)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닐까. 이 유명한 자전소설은 저자가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서당을 다니고, 동네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눈앞에 펼친 듯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미륵은 많은 이의 기대를 저버린 채 경성의전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1919년 삼일운동에 연루돼 수배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넌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안중근의 사촌 안봉근의 도움을 받아 가짜 중국 여권을 만들어 독일로 갔다. 그리고 안봉근 소개로 독일인 신부를 만나 수도원 생활을 하며 독일어를 익혔다. 1925년 뮌헨에 정착, 뮌헨대 동물학과에서 플라나리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동물학 박사학위였다.
전공은 동물학, 본업은 뮌헨대 동양학부의 한국학과 동양철학 강사였지만,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1946년 독일어로 출간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덕분이었다. 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 그해 독일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2차 대전 직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독일 사회의 웬만한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 책을 읽었다. 한국의 존재도 몰랐던 이들이 이미륵을 통해 한국의 풍습과 문화, 그리고 아픈 역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나중에 독일 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이미륵에게 독일어 배운 김재원
1937년 뮌헨 근교 그래펠핑의 이미륵 집에서 이미륵(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김재원(오른쪽). /이미륵기념사업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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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뮌헨에 이미륵보다 열 살 어린 한국인 유학생 김재원(1909~1990)이 찾아왔다. 김재원은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친척이 서양 부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자신도 일본보다는 독일에서 유학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정식 여권을 발급받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베를린에 당도했다. 그 또한 스무 살에 압록강을 넘은 것이다.
김재원은 1940년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귀국했고, 해방되자마자 국립박물관 초대관장이 되었다. 1945년 미군정이 들어서자 문교부장 로카드 대위를 찾아가 “내가 적임자이니 국립박물관장을 하겠다”고 나선 인물이다. 미국인 대위는 그의 박사학위 명함을 보고, “베리 굿 맨”을 연발하더니 바로 발령장을 보냈다. 36세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이 시대 독일어와 영어가 능통하며, 외국에서 관련 학위를 받아 온 ‘준비된 재원’은 김재원 박사뿐이었으리라.
독일 유학 시절 김재원 전 초대 국립박물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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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전쟁이 터져 서울이 점령됐을 때 유물을 전부 북으로 실어 보내라는 인민군의 협박에 맞서 ‘지연작전’을 펼친 일화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유물을 겹겹이 포장하면서 시간을 끌고, 포장한 다음에는 또 핑계를 대서 포장을 푸는 식이었다. 그러고는 9·28 서울 수복이 되자 미군에게 유물을 운송할 기차를 내놓으라고 해서, 전부 부산으로 소개(疏開)한 주역이다. 우리가 지금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현재 이건희 기증관 활용위원장을 맡은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의 딸이다.
◇書生으로 베를린서 유학한 화가 배운성
배운성의 ‘노는 아이들(팽이치기)’, 1930년대. /베를린 인류학박물관 제공 , Ethnologisches Museum, Staatliche Museen zu Berlin (사진 Martin Frank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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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김재원이 처음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만났던 한국인 유학생 그룹에 배운성(1900~1978)이라는 화가가 끼어 있었다. 배운성은 이미 1922년부터 베를린에 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전주 출신 갑부 백인기의 눈에 들어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이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독일로 갈 때, 백인기는 배운성에게 경제학을 공부하라며 같이 보냈다.
배운성은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여러 항구를 경유, 프랑스 마르세유에 내려 처음 유럽 땅을 밟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나서 들른 미술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 돌연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배운성은 생존력 최강의 인물이었다. 그는 베를린 예술대학을 졸업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서 제공받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1928년 유명한 판화가 케테 콜비츠가 교수로 와있던 이 학교에서, 그는 유화와 판화를 섭렵하고 혼자 수묵화도 익혔다.
배운성 ‘제기차기’(1930년대).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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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1927년 파리 살롱 도톤느 입선을 시작으로, 1933년 바르샤바 국제미전에서 1등 상을 받았다. 1930년대 함부르크, 프라하, 파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독일 잡지 ‘데어 벨트-슈피겔(Der Welt-Spiegel)’, 주간지 ‘디 보헤(Die Woche)’, 프랑스 주간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등에 작품 이미지와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그의 작품은 극동 아시아의 사정을 궁금해하는 유럽인들의 기호와 욕구에 영합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각종 미디어에 ‘한국의 아기’ ‘한국의 결혼식’ ‘제기차기’ ‘팽이치기’ 등 한국의 이미지를 소개했다. 그는 “독일 제국의 절반 크기인 한반도에 거주하는 2000만 명의 사람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만큼 자신들의 독자적인 근원과 고유한 역사, 그리고 독특한 민족성을 지닌다. 이들의 외양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1931년 9월 5일 자 ‘디 보헤’에 썼다.
배운성 ‘가족도’(1935년 이전). 왼쪽 끝에 흰옷을 입고 가죽 구두를 신은 인물이 화가 자신이다.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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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이 그린 그림은 지금 봐도 매혹적이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가족도’는 1935년 함부르크박물관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으로, 배운성의 말대로 한국인의 ‘외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성별, 연령별로 보여주는 표본과도 같다. 한국의 가옥, 의상, 인물의 골상, 신체적 특징 등이 서양인의 눈에는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배운성이 서생(書生)으로 있었던 백인기 가문의 가족은 하나같이 고요한 위엄과 고결함을 갖추고 있다. 작품 형식에서도 평평한 화면 처리, 윤곽선의 강조, 오방색 위주의 제한된 색채 선택을 통해 작가는 의도적으로 동양의 미학을 제시하고자 했다.
배운성 ‘자화상’(1930년대). /베를린 인류학박물관 제공, Ethnologisches Museum, Staatliche Museen zu Berlin (사진 Martin Frank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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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모자를 쓴 자화상’(1930년대). 유럽의 카바레를 배경으로 자신을 박수무당으로 그린 자화상이다.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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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배운성도 이미륵을 찾아간 적이 있다. 이미륵의 절친 화가 브루노 구텐존과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행복한 한때다. 그러나 배운성은 나치의 극단적인 예술정책을 피해,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러고는 1940년 2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빈손으로 파리를 빠져나와 귀국했다.
1930년대 뮌헨 근교 그래펠핑의 이미륵 집에서. 앞줄 왼쪽이 이미륵, 뒷줄 오른쪽이 배운성. /국립현대미술관 김복기컬렉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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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벼룩시장에서 발견된 배운성 작품
배운성이 귀국한 후, 독일인 친구 쿠르트 룽게는 ‘배운성, 한국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다’라는 제목의 책을 1950년 출간했다. 배운성이 들려주었던 한국의 민담과 설화를 독일어로 옮긴 책이다. 배운성의 독특한 판화 작품도 간간이 끼워 넣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만큼의 파급력은 아니었지만, 이 책도 현재 독일의 여러 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책의 후기에서 룽게는 “세계적 관심의 중심”이 되어버린 한국의 전쟁 상황을 언급하며, 이제 배운성을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을 포기해야겠다고 썼는데 실제로 이들은 재회하지 못했다. 배운성은 전쟁 통에 살아남기는 했지만, 전쟁 중 월북했고 다시는 유럽 땅을 밟지 못했다. 미술계 사람들은 다 아는 기적 같은 일이지만, 배운성이 파리에 놓고 온 작품들은 60년이 지난 2000년, 벼룩시장에 나와 한국인 소장가에게 입수되었다.
독일인 쿠르트 룽에가 1950년에 쓴 책 ‘배운성, 한국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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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 김재원, 배운성! 이들은 태어난 배경도 다르고, 유럽을 가게 된 이유와 방법도 달랐지만, 망국(亡國)의 유학생으로 독일에서 공부하며 한국의 유산을 소개하고 지키는 일에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노력이 현재 한류 스타와 같은 파장을 일으킬 수는 없었지만, 도전 정신과 의지력만큼은 세계 최강이 아닌가. 내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 전시를 위해 배운성의 ‘가족도’가 태평양을 건넌다. 그렇게, 압록강도 흐르고, 역사도 흐른다.
※ 베를린 인류학박물관 소장품 자료는 베를린 자유대학교 동양미술사학과 이정희 교수 팀의 협조를 받았다.
배운성 ‘성모자상’(1930년대). 서양 기독교의 전형적인 도상인 ‘성모자’의 한국식 버전이다. /대전프랑스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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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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