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서울행정법원은 인천시 서구 검단신도시에서 아파트를 짓고 있는 건설사 3곳(대방건설·금성백조·대광건영)이 각각 공사 중지 명령의 집행을 정지해달라며 제기한 가처분 신청 3건 가운데 2건을 기각하고 1건은 인용했다. 이에 따라 대방건설이 짓는 21개동 1417가구 중 문화재 보존구역에 속한 7개동은 공사를 계속 진행할 수 있다. 금성백조, 대광건영이 짓는 2개 아파트 단지(1900가구) 23개동 중 가처분 신청이 기각된 12개동의 공사는 9월 30일부터 중단됐다. 나머지 11개동은 문화재 보존지역에 포함되지 않아 이번 결정과 상관없이 공사를 진행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김포 장릉 사이로 보이는 신축 아파트 단지 건설 현장. 아파트 단지 3곳에 대한 문화재청의 공사 중단 명령에 따라 3곳 중 2곳의 공사는 중단됐지만, 나머지 1곳은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면서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왕릉 가린다” 문화재청, 아파트 공사 중지
문화재청은 2017년 문화재보호법 개정에 따라 문화재 반경 500m를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건축물 높이가 20m를 초과하면 문화재청 심의를 받아야 한다. 김포 장릉 인근에 짓고 있는 아파트 3개 단지는 경기도 김포시 장릉 인근에 있다. 장릉은 조선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년)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년)의 무덤이다. 김포 장릉은 사적 제202호로 지정돼 있으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일괄 등재된 조선 왕릉 40기에 포함된다.
문화재청은 대방건설, 금성백조, 대광건영 건설사 3사가 문화재 반경 500m 안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아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지난 7월 22일 건설사들을 상대로 아파트 공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으나 건설사들은 서울행정법원에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인용되자 공사를 진행해왔다. 공사가 재개되자 문화재청은 기존의 공사 중지 명령을 취소하고 다시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린 뒤 경찰에 고발했다. 건설사들이 법원에 재차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법원은 대방건설에 대해서만 인용 결정을 했다.
▶공사 중단에 입주자·건설사 ‘날벼락’
왕릉 근처에 문화재청의 심의 절차를 어기고 건축물을 지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 단지는 내년 6~9월 입주를 목표로 꼭대기 층(20~25층)까지 골조 공사가 이미 마무리된 상태다.
입주를 1년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공사가 무기한 중단되자 수분양자들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공사 중지나 원상 복구(철거) 명령을 내릴 수 있는데, 공사 지연으로 입주가 늦춰지는 것도 문제지만 철거 명령이 내려지면 재산 피해가 상당해서다. 입주 시기에 맞춰 살던 집을 처분하거나 임대 계획을 끝낸 경우도 다수 있어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입주 예정자 커뮤니티와 문화재청에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아파트를 분양받은 이들에게 선의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달라는 글이 잇따르고 있다. “죽은 왕 무덤이 산 사람보다 중요합니까?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나요” “문화재 때문에 입주민 권리가 침해돼도 되는 건가요” 등의 호소하는 민원을 올리고 있다.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건설사들은 이들대로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2014년 인천도시공사로부터 택지 개발 허가를 받은 땅을 사들였고 2019년 인천 서구청의 건축 심의도 거쳤다는 것이다. 토지를 매입한 2014년 이후 강화된 규정을 소급 적용한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문제의 아파트 부지는 인천도시공사가 검단신도시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 김포시로부터 현상변경 허가를 받은 뒤 2014년 건설사에 해당 부지를 넘겼다. 현상변경 허가는 문화재 보존구역 내 환경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승인받는 절차다. 당시 문화재 보존구역 내 건축물에 대한 고도 제한이 없었다. 반면 문화재청은 “2014년의 허가는 택지 개발에 관한 것이고, 아파트를 신축하는 것과는 별개”라고 반박했다. 착공 시기가 규정 변경 이후인 만큼 현상변경 허가를 다시 받았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건설사가 공사 중단으로 막대한 피해를 겪을 것이라고 주장하자 법원은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의 손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수분양자에게) 금전 보상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보기도 어렵다”고 했다. 즉 수분양자에게 금전적 보상하고 공사를 중단하라는 얘기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문화재 보호와 관련한 늑장 행정을 보인 문화재청과 지자체가 건설사와 입주 예정자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올해 5월에야 장릉의 경관 훼손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재청이 왕릉 인근 아파트 건설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도 아파트 골조 공사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문제가 더 커진 셈이다.
▶“아파트 철거해야” 국민청원 20만명 동의
건설사 측은 즉각 항소할 예정이지만 장릉 앞 아파트 철거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오는 등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지난 9월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김포 장릉 인근에 문화재청 허가 없이 올라간 아파트의 철거를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은 10월 6일 20만명 넘는 동의를 얻었다. 또 문화재청 게시판에는 “아파트를 그대로 놔두고 책임을 묻지 않으면 나쁜 선례로 남아 같은 일이 계속 발생할 것” “후손에게 남겨줘야 할 경관을 건설사 이기주의 때문에 망가뜨릴 수는 없다”라는 등의 글이 수십 건 올라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화재 보존을 위해 ‘아파트 철거’로 결론이 내려지든, 아파트 단지를 존치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히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불가피하게 됐다. 아파트가 철거될 경우 3400여가구의 수분양자가 고스란히 피해를 입게 되고, 아파트 단지가 그대로 남게 되면 조선 왕릉 40기가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삭제될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검단신도시 같은 사태가 다른 지역에서도 반복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남양주 왕숙·인천 계양·하남 교산·부천 대장·고양 창릉·광명 시흥 등 3기 신도시 신규 택지가 2019년부터 잇달아 발표됐고, 지난해 8·4 대책에서는 정부가 신도시 용적률을 상향하겠다고 밝히면서, 해당 지역의 문화재 보존과 택지 개발 사업이 충돌할 가능성이 커졌다. 예컨대 약 3만8000가구가 들어설 창릉신도시만 해도, 약 250m 거리에 ‘서오릉(사적 제198호)’이 위치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개발 사업과 문화재 보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 검단신도시 사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지자체별로 체계화된 문화재 관리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다운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9호 (2021.10.13~2021.10.19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