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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7년… AI가 국내 첫 560쪽 장편소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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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이 쓴 장편소설 ‘지금부터의 세계’가 25일 출간됐다. AI 소설이 단행본으로 발표된 건 국내 처음이다. 수학자, 벤처기업가, 의사 등 다섯 인물이 존재를 탐구하는 이야기가 560쪽에 담겼다. 저자로 두 이름이 올랐다. 하나는 글쓴이 AI ‘비람풍’, 다른 하나는 ‘소설 감독’ 김태연(61)이다. 이날 간담회에서 공학자 출신 소설가 김씨는 “여러 교수·전문가 도움을 받아 AI를 활용해 2014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며 “AI가 100% 창작을 하진 않았기에 ‘소설 감독’을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연세대에서 신소재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4학년인 1987년 월간 ‘문학정신’에서 소설가로 등단, 지금껏 장편소설을 5권 발표했다.

◇AI가 100% 창작? 사람 개입 필수

결론부터 말하자면, AI로 완전한 창작은 불가능하고 사람의 개입이 필요했다. 사람이 연출 감독처럼 인물과 사건, 시간과 공간 등 소설 구성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설정하고 도입이나 결말 문장을 손수 입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용감한 공주가 용에게 잡힌 왕자를 구출하러 떠난다’는 설계도를 사람이 입력해야 AI가 세세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행복하게 끝맺고 싶다면 ‘공주는 용을 물리치고 왕자를 구한다’는 결말도 입력해줘야 한다.

조선일보

/그래픽=양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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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 AI는 논리 추론과 딥러닝(심층 학습) 기반 언어 처리 기술을 활용한다. 비람풍은 1000권이 넘는 단행본과 소설, 뉴스 기사, 논문 등을 학습했다고 한다. 김 작가가 비람풍에 ‘손자가 할아버지 아파트를 방문한다’는 문장을 입력하면,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할아버지가 소나무 분재, 느티나무 분재 등이 숲을 이루고 있는 거실에서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서성이다가 하소연한다. 무슨 일인가 싶다’는 여러 문장이 만들어진다. 김 작가는 “설계도뿐 아니라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명령어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편 속 여러 이야기 하나하나에 인간의 손이 필요한 셈이다.

기자가 보기에 책 속 이야기가 매끄럽게 전개되지 못하고, 문체도 들쭉날쭉하면서, 난해한 정보가 잔뜩 나오기도 했다. 김 작가는 “AI가 너무 박식해 때로 ‘투 머치 토커’(말 많은 사람)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문장은 사실상 교정을 보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라며 “문체는 완벽하지 않아도 공식에 맞춰 쓰는 ‘이류’ 소설가와 경쟁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AI로 달라지는 소설가

인간은 AI를 이용한 소설 쓰기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1973년 미국 위스콘신대학 연구팀이 2100단어 소설을 작성할 수 있는 AI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어린이 동화 정도의 짧은 소설은 쉽게 만들 수준이 됐다는 평가다. 2008년 러시아에선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AI가 학습해 만든 소설 ‘진정한 사랑’이 출판됐다. 2016년 일본에선 AI 단편이 호시 신이치 과학소설(SF) 문학상 예심을 통과했고, 이듬해 중국에선 현대시 수천편을 학습해 쓴 AI 시집이 발간됐다. 국내에서도 2018년 KT가 AI 소설 공모전을 열었지만, 출판 시장에 출시된 AI 소설은 없었다.

AI가 기존 문장을 응용하고, 어디까지나 인간이 상황을 설정하면 이를 채우는 식이기 때문에 창의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김 작가는 ”AI가 복잡한 소설을 구상할 능력이 없고, 최고 수준 작가의 디테일과 표현력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면서도 “글쓰기의 번거로움을 혁신적으로 줄일 순 있다”고 했다. 그는 “소설 창작 과정의 10%를 내가, 90%를 AI가 담당했다”고 주장했다. 작품 아이디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AI를 활용해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AI 시대에 예술에서 인간의 역할은 계속되겠지만, 이제까지와 달라진 모습일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가는 ‘소설 감독’으로 역할이 확장될 겁니다. 집필의 노동은 AI에 맡기고, 작품 기획과 연출만 하는 소설가가 미래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기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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