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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오마이갓] 저물어가는 ‘종교계 어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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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말 외환위기 사태 때 금모으기 운동에 앞장선 김수환 추기경(오른쪽 끝)과 월주 스님(오른쪽 두번째).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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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는 기쁨을 말할 수가 없어요.”

지난 26일 전북 김제 김산사에서 열린 월주 스님의 영결식에서 상영된 생전 육성 법문 중의 말씀입니다. 생전에 스님은 ‘돕는 기쁨’에 대해서 여러 차례 강조하셨지요. ‘오직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 바로 임종게(臨終偈·임종 때 남기는 깨달음의 말씀)’라는 ‘임종게 아닌 임종게’를 남기고 육신의 옷을 벗은 월주 스님의 생애가 눈앞을 스쳐갔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이제 종교계 어른의 시대는 저무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음 기사에서 여러 번 언급됐듯이 스님은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개신교 강원용 목사와 함께 국민적 어려움 극복에 앞장서곤 했습니다. IMF외환위기가 터지자 ‘금 모으기 운동’에 앞장섰고, 실업극복운동에도 나섰습니다. 당시 사진도 많습니다. 그때는 종교 지도자들이 한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국난 극복에 앞장서는 모습이 당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각 종교 내부에서 스스로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교육, 의료, 사회봉사 등등의 분야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함께 활동한다는 것은 각 종교 내외부의 반대와 비판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 분은 한마음으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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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한 월주 스님(오른쪽부터). 세 종교 지도자는 국난 극복을 위해 힘을 모았다. /금산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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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은 나이차도 많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1917년생,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생 그리고 월주 스님은 1935년생이었습니다. 월주 스님은 다른 두 분과 비교하면 조카나 막내 동생뻘이었지요. 그렇지만 세 분은 항상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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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말 조선일보 신년좌담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종교 지도자들. 왼쪽부터 청담 스님, 조덕송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경직 목사, 김수환 추기경.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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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데이터베이스에는 뜻깊은 사진이 저장돼 있습니다. 한경직(1902~2000) 목사님과 청담 스님(1902~1971)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한자리에 모여 환담하는 모습입니다. 1970년 연말 당시 조선일보 조덕송 논설위원의 사회로 신년좌담을 하기 위해 세 분이 모인 사진입니다. 이때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막내였습니다. 당시 좌담 내용은 1971년 1월 5일자 조선일보에 1개면 전체에 걸쳐 소개됐습니다. “자기를 살펴보고 자기를 찾아야 할 때” “평화·자유·정의·사랑 좌표 삼아야”라는 제목이 눈에 띄는 군요. 세 분은 각각의 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평생 사회적 문제에도 활발히 활동해온 분들입니다. 그런만큼 종교에 따른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서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주 회동을 하곤 했습니다.

이런 인연이 바탕이 돼 서로 왕래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2000년 한경직 목사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월주 스님이 영락교회를 방문해 조문했습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월주 스님은 “청담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경직 목사님이 조계사를 방문하여 조문한 일이 생각난다. 한 목사님은 개별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선 종교계의 큰 어른이셨다”라고 추모했지요. 당시 김수환 추기경도 조문 후 “한경직 목사님은 사랑과 용서의 사도였고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였다”고 애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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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서울 성북동 길상사 음악회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이 인사말하고 있다. 법정 스님 옆엔 원불교 박청수 교무. 이날 음악회는 천주교가 설립한 성가정입양원을 후원하기 위해 열렸다.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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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1932~2010)의 인연도 각별했습니다. 두 분은 서로를 마음 깊이 존중하면서 서로 명동성당과 길상사를 번갈아 방문해 강연도 하고 행사에 참석해 축하하기도 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2009년 김 추기경 선종(善終) 때 조선일보에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특별 기고를 통해 김 추기경에 대한 각별한 추모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두 분은 각각 ‘내 탓이오’운동과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 조용하지만 의미있는 시민운동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월주 스님 입적을 계기로 이런 종교계 거인들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깨닫게 되는 점은,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어른다운 생각을 하고 언행을 하면 나이가 젊어도 어른이 되는 것 같습니다. 1970년 김수환 추기경은 만 48세였습니다. IMF외환위기 사태가 터진 1997년 월주 스님은 만 62세였습니다. ‘깨달음의 사회화’를 구상한 1980년대엔 40대였지요. 나이보다는 마음의 그릇이 문제인 듯합니다. 젊어서부터 어른스러웠던 지도자들은 또한 은퇴 이후에도 사회의 어려운 곳을 향한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종교계의 어른들은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저는 천주교 성직자이지만 한국인이기에 제 몸 안에도 유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관용은 섞음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 뒤 다른 종교의 정체성도 인정하는 것”이라며 “다른 종교인의 신앙을 배운다고 자기 신앙이 없어진다면, 그 정도의 신앙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도 하셨지요. 법정 스님도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에 천주교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규칙을 싣고 “불교는 기독교에서 종교의 사회활동을 배우고, 기독교는 불교에서 한국의 전통을 배우면서 더 풍성하게 심화시켜 가야 한다”고 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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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강원용 목사 장례예배에서 조사를 읽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전기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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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은 관용·포용·개방으로 통하고 미성숙은 배타성으로 연결되곤 하지요. 종교계 어른들은 나라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종교와 손잡고 뜻을 모아 시너지 효과를 냈지요. 월주 스님까지 떠나시고나니 이제 과거엔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됐습니다. 종교계 어른들의 빈 자리가 더욱 아쉽습니다.

이번 월주 스님 영결식 안내 책자에 제자인 도법 스님은 아래와 같은 추모의 글을 실었습니다. “평소 도법은 스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밥상 한번, 용돈 한번 올리지 않았습니다. 불효라고 말하면 그 첫 자리는 제 자리입니다. 뒤늦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월주)스님께서 보여주신 깨달음의 실천인 보살행 수행을 내 삶으로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첫 자리가 효도라면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습니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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