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폐지 전에 일시적으로 코인 가격이 급등한다고 해도 이른바 ‘김치코인(국내 거래소에서만 거래되는 잡코인)’ 대부분은 결국 폭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법 테두리 밖에 있는 가상자산의 투자자 보호 장치는 전무하다. 반면 거래소 입장에서는 상폐로 인해 단기 차익을 노리는 이들과 매도에 나선 이들이 늘면서 수수료 수익을 거둘 수 있어 손해 볼 게 없다.
업비트가 24종의 디지털 자산에 대한 거래지원을 중단한 지난 28일 서울 강남구 업비트 라운지의 태블릿 PC에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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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타나는 코인 상폐 공포는 한동안 가상자산 거래소 업계에서 계속될 전망이다. 특금법으로 인해 거래소가 영업을 계속하려면 시중은행의 실명계좌를 발급받아야 한다. 그런데 시중은행은 거래소에 대해 상장된 가상자산의 신용도, 취급하는 가상자산의 수, 고위험 코인 거래량 등을 종합해 정량평가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잡코인을 많이 취급하는 거래소일수록 시중은행이 위험하다고 평가할 가능성이 큰 구조다.
앞서 국내 최대 거래소인 업비트는 지난 18일 24개 코인을 무더기로 상장 폐지(거래지원 종료)했다. 지난 11일에는 페이코인 등 코인 5개의 원화 거래를 중단하겠다고도 했다. 2위 거래소 빗썸도 지난 17일 4개 코인의 상장 폐지를 결정했다. 프로비트는 지난 1일자로 145개 코인을 원화 시장에서 상장 폐지하면서 대형 거래소뿐만 아닌 중소형 거래소들도 대거 코인 정리 작업에 나서고 있다. 상장폐지까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유의종목’으로 지정된 코인도 수십 종이다.
◇ 수수료 수익만 노린 무리한 상장이 투자자 피해 키워
가상화폐 전문가들은 거래소의 무분별한 잡코인 상장이 무더기 상폐 사태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상대적으로 ‘갑’ 위치에 있는 거래소들이 필요에 따라 잡코인을 마구잡이로 상장시켜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코인을 상장하면 투자자 거래량이 늘게 돼 거래소는 수수료 수익을 늘릴 수 있다. 업계 1·2위인 업비트와 빗썸은 국내서 코인 거래가 본격적으로 늘던 2017년 말부터 잡코인을 본격적으로 상장시키면서 투자자들을 모았다.
한 가상자산 거래소 관계자는 “코인 상장과 상폐 권한은 모두 개별 거래소에 있다”며 “이를 법적으로 제한할 근거도 없어 거래소가 마음만 먹으면 거래소에 득이 될 것 같은 코인을 쉽게 상장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명확하지도, 일관되지도 않은 거래소의 코인 상장·상폐 기준도 문제로 지적됐다. 앞서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코인 상폐와 관련 “비즈니스 역량과 기술 등이 내부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를 두고 업계와 투자자 사이에서는 거래소가 말한 ‘내부 기준’이 구체적이고 투명하게 공개된 적이 없어 오히려 혼란만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왔다. 상폐할 때 드는 이유마저 두루뭉술하다는 얘기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상폐를 시킬 만큼 문제 있는 코인이라면 애당초 왜 상장을 시켰느냐고 거래소를 비판할 수 있다”며 “상장하는 과정이 더 투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코인을 왜 상장시켰고, 왜 안전한지 거래소가 검증해야 한다”며 “거래소가 상장 코인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투자자에게 주면 투자자가 코인에 투자할지 선택하면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일러스트=조선DB |
익명을 요청한 한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한국거래소 같은 경우에는 주식 상장 규정과 상폐 규정의 기준이 같지만, 현재 코인 시장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라며 “상장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상폐 당한 코인 개발사 측이 가상자산 거래소를 공격하기도 하고, 소송전 등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상자산 거래소와 코인 발행 주체인 재단(프로젝트) 사이에서는 코인 상폐를 놓고 ‘줄소송’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카 코인’ 발행 주체인 피카프로젝트는 업비트에서 상폐 당한 것과 관련,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과 상장폐지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 등을 예고했다. 코인 상장·상폐와 관련한 법 규정이 전무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코인 구조조정이 닥치자 코인 발행 주체와 거래소 사이에 입장 차가 있는 탓이다.
이와 관련 한 업계 관계자는 “가상자산 거래소 입장에서도 상폐된 코인 발행업체들과 투자자에게 코인 상폐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건, 밝혔다가는 ‘그럼 문제 있는 코인을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상장시킨 것이냐’는 비판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구심점 되는 기관 없어… 업계 “코인 시장 죽을까 걱정”
여러 문제점이 나오고 있지만, 어느 누가 중심을 잡고 코인 상장·상폐 관련한 공통된 가이드라인 조차 구축하기 힘든 상황이다.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이 가상자산 거래소 모니터링(감시)을 하고 있지만 차명계좌 단속 등에 그치는 수준이다. 정부와 국회 등은 규제에 미온적이고, 가상자산 거래소끼리도 큰 협의를 하고 있지 않다.
한 가상자산 거래소 관계자는 “상장·상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만드는 곳도 없어 당분간 이러한 혼란은 이어질 것”이라며 “일단 거래소들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오는 9월 특금법 신청이 다가올수록 이런 잡코인 상폐 움직임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비트코인(왼쪽)과 도지코인을 형상화한 이미지 컷. /트위터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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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만 이런 상폐가 가속화하면 그사이 투자자들은 코인 자체의 변동성과 더불어 거래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코인 시장을 떠날 가능성도 있다”며 “금융당국 눈치에 잡코인을 상폐시키는 가운데 장기적으로 코인 시장에 부정적일 수 있는 상황을 가상자산 거래소가 만들어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최근 잡코인 정리가 장기적으로 코인 시장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지금 상폐 시켜서 코인 시장이 부실한 코인 거래를 막으면 잠재적인 피해자가 줄어들게 된다”며 “잡코인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과, 잡코인 상폐를 두고 이익형량을 따져본다면 투자자 피해 측면에서 후자의 이익이 더 크다”고 말했다.
이다비 기자(dab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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