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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특파원 칼럼] 또 다른 7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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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인환ㅣ베이징 특파원

오는 7월1일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둔 중국은 기념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수도 베이징에선 주말이면 천안문 광장 일대의 교통을 차단한 채 행사 예행연습이 열리고 있다. 중국 각지의 혁명 유적지마다 이른바 ‘홍색관광’에 나선 인파가 북적인다.

7월1일은 또 다른 기념일이기도 하다.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1842년 난징조약에 따라 영국에 내준 지 155년 만인 1997년 그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다. 중국으로선 ‘치욕의 역사’를 마감한 날인 셈이다.

약 5년 전인 2016년 6월2일 홍콩중문대 학생회장이던 어니 초우쉐펑은 <홍콩경제저널>과 인터뷰를 했다.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79일간 이어졌던 ‘우산혁명’에 적극 참여했던 그는 이후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로컬리스트’가 됐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따라 처음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을 추모하는 6월4일 촛불집회에 참가한 뒤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수많은 홍콩인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집회가 끝난 뒤 초우쉐펑은 천안문 민주화 시위에 대한 자료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는 “촛불집회에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해마다 6·4 촛불집회에 참석하면서 조금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매년 똑같이 ‘애도’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초우는 “우산혁명을 거치면서 스스로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이란 정체성이 생겨났다”며 “더는 중국의 민주화가 홍콩인의 정치적 의무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는 2014년 이후 촛불집회 참석을 중단했다.

같은 인터뷰 기사에는 당시 갓 지련회 상임위원 활동을 시작한 변호사 토니 초우항텅도 등장한다. 그는 고작 4살 나던 해인 1990년 부모님을 따라 처음 6·4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이후 그는 해마다 촛불집회 참석을 거르지 않았다. 영국 유학 시절엔 기숙사 방에서 홍콩섬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리는 촛불집회 생중계 화면을 틀어놓고 홀로 촛불을 들었을 정도였단다.

“홍콩인이 세계적 차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국가 정체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것은 본토 당국의 사고방식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초우항텅은 홍콩인들이 스스로를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이라고 여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라고 했다. 그는 “중국 민주화가 홍콩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라며 “중국이 홍콩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데, 단순히 이웃 국가로 여길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민주화를 위한 싸움에서 홍콩인은 본토인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들의 인터뷰 3년 뒤인 2019년 6월4일 촛불집회 직후 홍콩에서 송환법 반대 시위가 시작됐다. 초우쉐펑도, 초우항텅도 시위대의 맨 앞에 섰다. 이후의 상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송환법이 폐기되고 범민주 진영이 구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중국 당국이 직접 나서 ‘홍콩판 국가보안법’을 시행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지난해 30년 만에 처음으로 금지됐던 촛불집회는 올해도 열리지 못했다.

초우쉐펑은 지난 4월 말 캐나다로 망명길에 올랐다. 송환법 시위 당시 입법회 점거 농성에 가담했던 그는 언제 체포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초우항텅은 지난 6월3일 금지된 촛불집회를 선전·광고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석방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홍콩 반환 24주년이 코앞이다.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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