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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기자가만난세상] 노동이 조롱받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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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A씨는 눈 깜짝할 새에 700만원을 잃었다. 신나게 치솟던 비트코인 시세가 폭락하자 몇달치 월급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올해 2월부터 비트코인에 투자해 한때 1000만원의 수익을 올린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비트코인 전도사’로 통한다. A씨의 투자 수익에 감탄한 친구들이 그를 따라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급락장은 비트코인 전도사도 두려움에 빠뜨릴 정도였다. A씨는 “비트코인 투자자들은 ‘비트코인 1억 간다’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론) ‘2018년처럼 휴지 조각이 되는 거 아닌가’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폭락을 두려워하면서도 굳이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드는 이유는 뭘까. 한 달치 월급을 비트코인에 투자했다는 B씨는 “가상화폐가 ‘떡락’(시세 폭락)하면 한강으로 가야 하지만, 그래도 ‘떡상’(폭등)하면 부자 된다는 희망이 있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늙어 죽는 것밖에 더 되냐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가상화폐가 위험한 투자라는 것은 알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계일보

조희연 사회부 기자


지금의 청년들은 노동소득에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 사이 유행어 중 ‘돈복사’가 있다. 가상화폐에 투자하면 복사기를 돌리듯 돈이 쉼 없이 불어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너희가 종일 일해서 번 돈을 나는 투자로 쉽게 벌었다”는 자랑과 조롱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가상화폐는 등락 폭이 커서 은행 이자율이나 주식 수익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가상화폐 계좌의 돈이 시시각각 불어나는 모습을 보며 이들은 “가상화폐가 신이고 진리다”라고 느낀다고 한다. 가상화폐는 그의 삶을 의탁할 수 있는 종교가 된 셈이다.

노동소득보다 불로소득에 열광하는 사회다. 과거에는 땀 흘리지 않고 쉽게 번 돈은 불로소득이라고 비난했다. 지금 불로소득은 비난이 아닌 부러움의 대상이다. 건물주는 ‘갓물주’로 불리고, 대중매체는 건물주를 대단한 사람으로 떠받든다. 아이들은 장래희망으로 건물주를 말하고, 청년들은 ‘돈 많은 백수’를 꿈꾼다. 힘들게 일해봤자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쥐꼬리만 하다는 오래된 자조는 ‘원화채굴’이라는 표현으로 승화됐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은 월급은 가상화폐에 투자할 돈(원화)을 모으는 행위(채굴)에 불과하다며 월급을 원화채굴이라고 부른다.

모순적이게도 노동을 존중하는 사회를 공언한 현 정부에서 노동이 조롱받고 있다. 일자리가 없다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는 불안정하다고 외쳐온 청년들은 이제 노동소득보다 자산소득에 승산을 걸고 있다. 실질소득은 줄어드는데 집값은 폭등하고 있다고, 가난하면 사회경제적으로 낙오돼버린다고 말해왔지만 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노동존중 사회가 단순한 슬로건에 그치지 않으려면, 청년들이 노동으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야 한다. 안전하게 일하고 그 노고를 보상받는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주체는 가상화폐가 아닌 정치가 돼야 하지 않을까.

조희연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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