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그곳
스위스 브베(vevey)의 제네바 호수. © 로이터=뉴스1 자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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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에르=뉴스1) 신정숙 통신원 = 내가 태어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산다는 것, 가족을 이루고 산다는 건 쉽지 않다. 날씨, 음식, 언어, 문화, 사람, 규칙과 규범 등등. 세상에 나온 아기가 천천히 하나씩 많은 것들을 익혀가는 것처럼 속도만 다를 뿐 다시 배워야 한다. 간신히 정착해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괜찮은지, 마음에 드는 지, 잘 맞는지 살아봐야 하고, 맞지 않으면 특히 사람을 사귀기 힘들어 외로울 때, 다시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게 된다. 그렇게 여기 저기,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작은 산골에서, 지인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그러다 다시 완전한 이방인으로 자기 삶의 평온을 찾은 H가 말한 곳 브베를 찾았다.
4월, 봄이라고 말하면 바로 겨울로 달아나버리는, 날씨가 심술궂은 달이다. 그러다 가끔 운좋게 햇살 따뜻한 날이 예보되면 스위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수를 찾는다. 한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레만 호수(Lac de Léman) -어떤 이들에게는 호수 가운데 분수대가 있는 제네바 호수로 기억되겠지만- 는 길이 73km, 너비 14km, 북쪽으론 스위스, 남쪽으론 프랑스로 나뉘어져 있다. 호수는 서쪽 제네바에서 동쪽 몽트뢰까지 길게 이어졌고 이들 두 도시 사이에 로잔과 브베가 있다. 브베는 이들 유명 관광도시를 살짝 벗어난 곳의 수줍은 청년같은 느낌의 도시다.
알리망타리움(식품박물관) 앞, 레만호수에 설치된 브베의 상징물 중 하나인 포크상. © 신정숙 통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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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슬레사가 1985년 브베에 건립한 박물관 알리망타리움(Alimentarium, 식품박물관)은 음식과 영양에 대한 다양한 면을 다루고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 앞쪽엔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찰리 채플린의 동상과 도심 위쪽에 그가 마지막 여생 25년을 보낸 저택의 채플린 월드(Chaplin’s World) 박물관도 네슬레사가 투자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앙리 네슬레가 설립한 다국적 기업 네슬레사는 몇 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브베를 떠나야 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브베 지역인들의 노력으로 150년을 넘어 브베의 한 중심축이 되었고 회사를 통해 다양한 외국인들도 유입되고 박물관 설립을 통해 도시 문화도 선도하고 있다.
스위스는 전체 인구의 25%가 외국인인 대표적인 이민 국가로, 브베는 약 43%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다. 인구의 절반이 외국인인 제네바와 브베와 같은 비율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로잔에 비해 스위스의 전형적인 소박함과 오래된 전통을 통한 기품을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유입된 외국인들과의 적절한 균형과 화합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브베의 스카이 라인을 장식하는 러시아 정교회와 바로 위쪽에 있는 세인트 마틴 개신교 교회다. 인구의 40% 이상이 카톨릭인 브베에는 이들 종교 외에도 다양한 종교가 허용되고 있다.
호수를 벗어나 도심 위쪽 언덕을 오르면 러시아 정교회를 만날 수 있다. © 신정숙 통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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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마틴 교회 뒤쪽엔 유럽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넓은 공원 묘지가 있다. H도 이곳 사람들처럼 종종 공원 묘지를 찾아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학업을 마치고 영국에 취업을 하게 되어 어렵사리 방을 구했는데 그때 묘지 옆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묘지 옆이라 두렵고 무서웠지만 생각과 달리 차분하게 마음의 안정감을 줘서 그 이후 도시를 방문하면 공원 묘지를 찾아간다고 한다. 종종 유명 인사가 안장되어 있는 도시의 묘지는 관광 코스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묘지 주변으로 소박한 데이지꽃이 피어 있고, 묘지 중간엔 두 그루의 큰 나무 아래에 벤치가 놓여 있다. 그리고 묘지 사이 사이의 통로에는 유럽의 대저택이나 성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사이프러스가 길게 늘어서서 사람들을 반긴다.
세인트 마틴 교회의 공원 묘지. © 신정숙 통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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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관광 도시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기죽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있는 도시, 여느 도시처럼 이방인들만의 구역이 따로 있지 않고 이방인과 현지인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어서 마음의 중심,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어 이곳이 좋다는 H. 태어난 곳을 떠나 타지에서 다시 뿌리, 특히 마음의 뿌리를 내리는 건 쉽지 않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정착하기 위해,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때 그 사회가 좀 더 열려 있고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지 않다면 뿌리를 내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서 안정을 찾았다는 H가 브베를 사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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