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로부터 짓밟힌 나의 인권을 되찾고 싶어”
최말자(75)씨가 지난해 5월6일 오후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를 하기 위해 부산지방법원(연제구 거제동)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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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좋아졌는데, 왜 사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을까요.”
최말자(75)씨는 지난 8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18살이던 1964년, 그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었고 이듬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해 5월 최씨는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는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지난달 이를 기각하며 ‘56년 만의 미투’에 응답하지 않았다. 최씨가 제시한 증거들이 무죄를 인정할 새로운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 성차별적 인식이 만연했던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법관 등의 직무상 범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최씨는 기각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고 말했다. “56년 전 들었던 말들이 기억나서 잠을 못 잤어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매일 산을 4~5시간씩 올랐어요.” 성폭력 이후 가해 남성 노씨가 집에 찾아와 식칼을 들고 위협하던 모습, “가시나가 못돼서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며 책상을 쾅쾅 치던 검사, “노씨와 결혼하면 되지 않느냐”던 판사와 변호사가 자꾸만 떠올랐다. 당시 노씨의 혀를 깨문 최씨는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노씨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노씨의 성폭력 혐의에 대해서는 기소하지 않았다.
최씨는 법원의 기각 결정에 즉시 항고했다. “(1964년 검찰이)강간미수 사건에서 강간미수를 빼버린 것 자체가 문제인데, 과거와 현재의 판결 모두 상식에 맞지 않는 판결입니다. 정당방위로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싸울 겁니다. 국가로부터 짓밟힌 나의 인권을 되찾고 싶습니다.”
최씨는 뒤늦게 가부장제와 성차별, 여성 인권에 대해 배우면서 비로소 그가 겪었던 일들이 왜 불합리한지 알게 됐다. 방문을 잠그고 굶어도 봤지만, 아버지는 여자라는 이유로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63살이 돼서야 2년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에서 ‘성, 사랑, 사회’ 과목을 들으며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오히려 가해자가 됐던 막연한 ‘억울함’을 설명할 명료한 언어가 생겼다. 아들을 바라는 이름 ‘말자’도, 택시운전사가 되고 싶어 아버지 돈을 훔쳐 면허를 땄지만 취직하지 못한 것도, 독신 여성들끼리 사는 공동체를 꿈꿨지만 떠밀려 원치 않는 결혼을 했던 것도 모두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최씨에게 가장 힘이 된 건 ‘연대’였다. “언니, 꼭 이 억울함을 풀자”며 자기 일처럼 도왔던 대학 동기, 최씨가 찾아간 한국여성의전화, 우리 사회 곳곳의 ‘미투’를 통해 56년간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삶을 포기하려는 시도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나의 운명은 내 것이고, 나는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잖아요. 이런 잘못된 판결이 없어져야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밖으로 나와 도움을 청하니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저와 같은 경험을 한 분들에게 끝까지 살아서 싸우자, 그리고 도움을 청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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