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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2000억 그림 남기고…가난과 추위에 떨며 떠난 모딜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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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64] 모딜리아니(화가, 1884~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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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시대 파리에 입성한 이탈리아 청년

1907년 파리에서 1년 전 세상을 떠난 화가의 회고전이 열렸다. 이 화가는 젊었을 적 온갖 조롱을 받았다. 실패한 화가라는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파리를 떠났다. 시골에서 은둔하며 수십 년간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화가는 사과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봤다. 좌우, 위아래에서 관찰한 다양한 시점의 사과를 한 캔버스 안에 그렸다. 피사체를 집요하게 분석하며 대상의 본질만을 뽑아내 그리려는 시도였다. 미술계에선 이 예술가의 실험을 혁명으로 받아들였다. 화가의 이름은 세잔이다. 같은 해 인상파 화가 대부였던 모네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꿋꿋하게 수련 연작을 그리며 명성을 떨쳤고, 마티스가 창시한 야수파도 파리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화가 폴 고갱 그림도 신드롬을 일으켰다.

예술사에서 1907년 파리는 황금시대였다. 세잔과 모네와 같은 예술가들이 이룬 해방 덕분에 화가들은 자유를 얻었다.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기계적으로 묘사하는 기술자 신세에서 벗어났다.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로 거듭났다. 파리는 새 물결로 가득했다. 바로 이 시기에 파리에 입성한 젊은이가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였던 그는 세잔, 모네, 고갱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파리에 왔다. 큰 꿈을 품고 기회의 땅으로 온 이 남자의 이름은 모딜리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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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1918~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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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이방인 화가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로 유명하다. 모델은 주로 여성이었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과 목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우리를 쳐다보고 있지 않다. 눈동자가 없기 때문이다. 눈은 영혼의 통로로 일컬어진다. 우리는 상대방 눈만 보고 감정을 읽어내기도 한다.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성들은 눈동자가 없다. 그런데도 어떤 느낌을 풍긴다. 눈동자가 없는 이 여성들은 저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처럼 묘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아득한 내면세계를 탐험하는 사람 특유의 공허함도 느껴진다. 모딜리아니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에 속하는 화가다. 에콜 드 파리는 인상주의, 입체파처럼 특정한 미술사조는 아니다.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로 몰려든 이방인 예술가 집단을 뭉뚱그려 에콜 드 파리라고 한다. 태어난 곳을 훌훌 떠나 파리로 흘러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오랫동안 핍박받으며 유랑했던 상처를 공유한 민족답게 그들은 서로 교류했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선 특정한 화풍을 공유하지 않고, 제각각의 노선을 걸었다.

모딜리아니도 유대인이었다. 1884년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 항구마을 리보르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모딜리아니는 유년 시절을 풍족히 보냈다.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딜리아니가 열 살이 될 무렵 집안에 먹구름이 끼었다. 아버지 사업이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쇠약해졌고,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딜리아니는 가난에 내던져졌다. 세금 고지서처럼 또 다른 불운이 차곡차곡 소년에게 찾아왔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던 그는 좋은 병원에서 값비싼 진료를 받으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난 후부터 그러지 못했다. 장티푸스, 늑막염, 폐렴에 시달렸다. 겨우 10대였는데도 몇 번이나 죽음 문턱 앞까지 다녀올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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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모딜리아니의 초기작 `리보르노의 거지`(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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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미남 예술가

모딜리아니를 예술 세계로 인도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명문가 출신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 예술 소양도 깊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카프리, 로마, 피렌체를 여행했다. 폐가 안 좋은 모딜리아니를 위해 기후가 온화한 지역으로 떠난 요양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모자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다녔다. 경이로운 기운이 가득한 르네상스 시대 예술품을 접한 모딜리아니는 자연스레 자신도 예술가가 되기를 꿈꿨다. 여행 이후 모딜리아니는 그림 그리기에 매달렸다. 미술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회화를 배웠다. 다음 단계는 정해져 있었다. 기회의 땅으로 가야 했다. 스물두 살 모딜리아니는 당시 모든 유럽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큰 꿈을 품고 파리로 향한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에 자리 잡았다. 그곳엔 가난한 이방인 예술가들이 우글거렸고, 그들은 자주 어울렸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피카소다. 젊은 예술가들은 피카소 작업실에 모여 예술에 관해 토론했다. 그들은 모두 세잔을 존경했고, 세잔처럼 새로운 회화를 개척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영리했던 피카소는 세잔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재빨리 입체주의 화풍을 개척했다. 피카소는 젊은 나이에 위대한 화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세잔을 흉내 낼 줄만 알고, 자신의 화풍을 개척하지 못한 모딜리아니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만큼은 몽마르트르 예술가들 사이에 퍼졌다. 모딜리아니는 예술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대표적인 미남이다. 모딜리아니 주변엔 여자가 많았다. 낮엔 그림을 그리고 저녁엔 술집에 가서 흥청망청 취하며 자유로운 연애를 했다. 방탕한 미남 화가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의 대표적인 보헤미안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방탕은 쾌락이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행위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의 설움을 술로 잊고자 했다. 가뜩이나 건강이 안 좋았던 그는 더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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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브랑쿠시와 함께하던 시기에 모딜리아니가 제작한 조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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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린 얼굴, 눈동자 없는 눈

모딜리아니의 예술 세계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도록 도운 인물은 조각가 브랑쿠시다. 그는 한때 로댕의 조수였다. 로댕은 브랑쿠시에게 "계속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브랑쿠시는 "거목 밑에서는 새싹이 자랄 수 없습니다"라며 스승을 떠났다. 로댕의 품을 벗어난 브랑쿠시는 스승과 다른 영토를 개척해 현대 조각의 신화가 됐다. 루마니아 출신인 브랑쿠시는 모딜리아니가 어울렸던 에콜 드 파리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브랑쿠시는 방황하는 모딜리아니에게 조각을 권했다.

브랑쿠시와 함께하며 모딜리아니는 동료에게서 많은 것을 흡수했다. 브랑쿠시는 추상 조각 길을 연 예술가다. 그는 피사체 형상을 단순화했다. 핵심이 아닌 것들은 과감히 버렸다. 브랑쿠시 작품은 간결하고 비유적이다. 아프리카 토속 미술처럼 원초적 기운이 깃들어 있다. 실제로 브랑쿠시와 모딜리아니는 아프리카 미술에 매료됐다. 그들은 길쭉한 타원형 얼굴을 한 원시 부족 가면을 유심히 관찰했다. 인간 얼굴을 단순화하며 왜곡한 이 가면에서 묘한 기운을 느꼈다. 둘은 아프리카 가면과 닮은 얼굴 조각상을 제작했다. 모딜리아니는 회화를 떠나 조각에 매달렸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그의 변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폐가 안 좋았던 모딜리아니에게 조각 과정에서 나오는 돌가루는 치명적이었다. 조각을 할수록 건강은 나빠졌다. 모딜리아니는 회화 세계로 강제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조각을 접하기 전과 달라졌다. 브랑쿠시와 함께하며 쌓은 경험을 그림에 적용했다. 가늘고 긴 얼굴, 사슴처럼 기다란 목, 눈동자가 없는 눈. 모딜리아니 특유의 초상화는 이때부터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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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그림에 눈동자를 그린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의 초상(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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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영혼을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소."

모딜리아니는 지인 소개로 잔 에뷔테른이라는 여성을 만났다. 술집을 전전하며 불쏘시개 같은 연애만 하던 모딜리아니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모딜리아니는 고백했다. 잔 에뷔테른 역시 모딜리아니에게 마음을 뺏겼다. 둘은 연인이 됐다. 모딜리아니는 잔에뷔테른을 그렸다. 그의 대표작 상당수는 잔 에뷔테른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잔 에뷔테른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여성이었다. 잔 에뷔테른의 부모에게 모딜리아니는 재앙이었다. 가난하고, 병약하며, 밤만 되면 술독에 빠지는 무명 예술가와 사랑에 빠진 딸을 뜯어말렸다. 하지만 불붙은 연인을 갈라놓지 못했다. 연인은 동거하며 부부처럼 지냈다. 사랑을 얻은 모딜리아니는 그림으로만 인정받으면 됐다. 하지만 그는 피카소와 같은 스타 화가들의 후광에 가려져 조명받지 못했다. 전위 예술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기에 초상화는 한물간 장르로 여겨졌다. 자괴감은 나날이 커졌다. 모딜리아니는 마음의 병을 술로 치유하려 했고, 그럴수록 수렁에 빠졌다. 지인 도움을 받아 개인전을 연 적은 있다. 경찰은 전시회에 걸린 누드화 를 문제 삼았다.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작품을 압수했다. 모딜리아니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는 허무하게 끝났다.

어느 날 잔 에뷔테른이 모딜리아니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는 제 얼굴엔 왜 눈동자가 없나요?" 모딜리아니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눈동자를 그리겠소." 둘은 가난했지만, 온기를 나누며 버텼다. 사랑은 계속 깊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모딜리아니 그림 속 잔 에뷔테른에게는 눈동자가 생겼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딸이 먹을 밥값도 벌지 못했다. 둘째까지 임신한 잔 에뷔테른은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잔 에뷔테른의 부모는 딸과 손녀만을 받아줬다. 모딜리아니는 문전박대당했다. 잔 에뷔테른이 친정집에서 몸을 추스르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냉기 가득한 골방에서 떨었다.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온갖 병을 달고 살았던 그의 몸은 무참히 무너졌다.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겨우 36세였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인을 잃은 잔 에뷔테른은 모든 걸 포기했다. 그는 모딜리아니가 사망한 후 이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딜리아니는 불운했던 예술가답게 사후에 재조명받았다. 오늘날엔 그림값이 비싼 화가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2015년 뉴요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딜리아니 작품 한 점이 약 2000억원 낙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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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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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쓸한 자화상

모딜리아니는 고집스레 초상화를 그렸지만, 좀처럼 자신을 그리지는 않았다. 1919년 급격히 쇠약해진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음을 알았을까. 죽음의 문턱 앞에 있었던 그 시기에 모딜리아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화상을 그렸다. 그림 속 모딜리아니는 팔레트를 들고 있다. 목도리를 동여맸고,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다. 눈은 거의 감겨 있다. 가난 때문에 아내와 자녀와 떨어져 있었던 이 남자는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짚는 듯하다. 생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버티던 모딜리아니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세잔처럼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어 고향을 떠나온 이 남자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소멸해가는 자신을 기록했다. 그리고 곧 완전히 사라졌다.

모딜리아니가 존경한 세잔은 모딜리아니 못지않은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꿋꿋하게 버텼고, 세상이 자신의 그림을 인정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세잔의 사과 그림에선 인내하고 인내하며 끝내 만개한 인간의 노력이 느껴져 숙연해진다. 모딜리아니도 묵묵히 나아갔다. 자신의 화풍을 만들기 위해 멈추지 않고 연구했다. 하지만 선천적인 질병이라는 불가항력적 불운을 이기지는 못했다. 영광을 거머쥐기 직전, 자신에게 화려한 빛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도 못한 채 떠났다. 그래서 모딜리아니가 그린 인물들은 쓸쓸해 보인다. 이 화가의 삶을 알고 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중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노력하는 모두가 낙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꿈을 향해 성실히 걷더라도 대부분은 꿈을 이루지 못한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수십 년을 개미처럼 일한 사람이 은퇴하자마자 말기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받기도 한다. 신문을 펼쳐 사회면을 보면 거기엔 온갖 비극이 전시돼 있다. 아무도 비극을 원하진 않지만, 눈물과 슬픔은 길가의 돌멩이처럼 어디에나 널려 있다. 모딜리아니 그림 속 인물들은 이 냉담한 진실을 받아들인 자들의 얼굴을 닮았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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