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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박미산의마음을여는시] 물그릇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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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추석 앞두고 지진만 왔다 가는 것이 아니다

지린내와 얼룩 묻은 옷가지의 몸은

깃털인데 아직은 늑골 뼈가 곧은 아버지 모시고 목욕탕엘 왔다

어깨와 허리와 가슴이 쩍쩍 버찌같이 불거져있지만

물보라 뒤집어쓰니, 밤새 만든 열병이 혼자 빠져나온다

쇄골과 허벅지 안쪽, 온전한 곳만 물이 고인다

몸에 난 저 물그릇, 삶의 부유물로 잠잠 맑아진다

얼마나 많은 그릇이 있어야 거짓 없는 몸이 되는 것인지

한 겹 더 그늘지고 숨을 잇는 시간만이

추석 앞두고 산골짜기 억새밭으로 가는 길을 일러준다

반쯤 감긴 눈, 손톱으로 붐비는 저승빛 앞에서

사그락사그락 옆구리 때를 미는데

홀딱 때 벗은 발가락 끝에까지 숨 씹어 뱉는 기도만 깊다

세계일보

낼모레가 추석입니다.

이때쯤이면 각처에서 자식들이 고향집으로 돌아옵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부모님도 자식들도 고향에 오고 가는 걸 꺼리지만, 시인은 병이 깊은 아버지가 계시기에 고향으로 갑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목욕탕에 간 아들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움푹 파인 쇄골, 불쑥 솟은 늑골, 어깨와 허리와 가슴이 쩍쩍 버찌같이 불거져있는 아버지의 몸을 씻기며 아들은 슬픔을 삼킵니다.

아버지는 반쯤 눈을 감고 아들의 손길에 온몸을 맡깁니다.

물보라 뒤집어쓴 아버지의 몸에 물그릇이 생깁니다.

쇄골과 허벅지 안쪽, 그리고 억새밭으로 가는 길을 떠올리는 아버지의 눈에서도 그렁그렁 물그릇이 보입니다.

아들 눈에 괴어있는 눈물과 똑같은,

박미산 시인, 그림=원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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