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2 (일)

[문정인 칼럼] 다시 평화를 말한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평화가 자제와 타협이라면, 오만과 독선은 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상대의 평화 없이는 나의 평화도 없음을 외면하는 이분법적 단견이 염려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해야 한다. 전쟁만을 준비해서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겨레

문정인 ㅣ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한국전쟁 70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슬픈 전쟁이다. 사람으로 따지면 고희를 맞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 전쟁을 두고 우리는 아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18년 기적처럼 찾아왔던 평화에 대한 기대가 2019년 하노이에서의 좌절과 더불어 신기루가 되는 듯하다.

평화란 무엇일까? 전쟁의 부재를 평화라고도 한다. 그러나 군사적 억제와 휴전협정으로 얻어지는 평화는 언제든 전쟁이 재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극적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적 원인을 제거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한 ‘적극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

로마의 전략가 베게티우스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경구를 남겼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전쟁 준비는 손쉽게 군비 증강과 강압 외교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현실주의자 헨리 키신저는 그의 저서 <회복된 세계>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전쟁의 논리는 힘이며, 힘이란 본질적으로 한계가 없다. 평화의 논리는 비례이며, 비례란 곧 제한을 의미한다. 전쟁의 성공은 승리이며 평화의 성공은 안정이다. 승리의 조건은 전념이고 안정의 조건은 자제다.” 평화는 강압과 굴복이 아니라 자제와 타협의 산물이라는 통찰이다.

오늘 평화를 말하는 많은 이들은 자제와 타협을 잊는다. 미래의 큰 평화를 위해 오늘의 작고 불안한 평화는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손쉽게 말한다. 현재의 불안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전쟁이 두려워 굴종적 타협을 맺는 패배주의일 뿐이라고 폄훼한다. 미래의 더 큰 인명 손실을 막기 위해 지금의 적은 손실은 각오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전쟁관마저 눈에 띈다. 그러나 작고 불안한 평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크고 지속가능한 미래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겠는가. 크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오늘과 내일의 인명을 지키는 것이 평화의 본질이다.

<조선일보> 6월29일자 칼럼에서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핵무장한 북한과의 평화란 북한의 핵 인질 상태에서 인질범인 북한이 자의적으로 조건을 결정하는 평화”라고 썼다. 이는 “굴욕적 평화, 노예적 평화”일 뿐이라고. 누가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하자고 했단 말인가. 정부는 취임 이후 줄곧 북한의 비핵화 없이는 한반도 평화도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병행 추진해왔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에는 북측이 영변과 동창리의 핵·미사일 시설을 완전히, 영구히 폐기하고 미국은 이에 상응하는 부분적 제재완화를 단행하는 초기 조치를 통해 신뢰를 구축한 뒤, 쌍방 협의를 통해 포괄적 로드맵을 만들어 단계적으로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비핵화를 이루자는 대안을 제시해왔다.

북한의 핵이 우리에게 위협이라면, 압도적인 한-미 연합전력과 확장 억제, 미국의 핵능력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오히려 평양이다. 인질로서의 굴욕적 평화를 용인했다면 문재인 정부는 국방비를 연 8%씩 증가할 필요도, 첨단 전력을 획득할 필요도, 한-미 동맹과 확장억제전략에 연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의 크기로 따지자면 북한의 그것이 우리의 그것보다 작을 리 없다. 상대의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두려움만을 강요하는 동안 자제와 타협이 가능할 리 없다.

존 볼턴을 비롯한 미국의 강경파들은 평양에 핵과 경제발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전보장에 대한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평양이 ‘선 비핵화 후 보상’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강압 외교로 평양을 몰아세우고 작동하지 않으면 군사행동도 불사한다는 볼턴식 사고방식은 평화의 길이 아니라 전쟁의 길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에 기초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 없는 일방적 한-미 공조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한국 외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평화경제’는 ‘핵만 포기하면 잘살게 해주겠다’는 유혹이 아니다. 경제협력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적인 존재가 될 때라야 각자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미래가 설득력 있다고 믿는 순간 평양은 비로소 핵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국제적 제약에도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일이 오히려 북한을 비핵화로 이끌 레버리지를 강화할 수 있는 이유이고, 이를 통해 미국에 대한 레버리지도 더욱 커질 수 있는 이유다.

평화가 자제와 타협이라면, 오만과 독선은 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상대의 평화 없이는 나의 평화도 없음을 외면하는 이분법적 단견이 염려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해야 한다. 전쟁만을 준비해서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뉴스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