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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편집국에서]윤석열 총장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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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윤석열 검찰총장이 졌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과 싸워서가 아니다. 총장의 막강한 권한을 측근 비호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명분 없는 싸움이었고, 그래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 대한 항명으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경향신문

오창민 사회에디터


‘검·언 유착’ 의혹이 사태의 발단이다. 채널A 기자가 한동훈 검사장과 특수관계라고 주장하며 금융사기로 수감 중인 기업인에게 접근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비리를 제보하라고 회유·협박했다는 것이 골자다. 한 검사장은 각종 대형 사건에서 발군의 수사력을 보여준 엘리트 검사로 윤 총장의 최측근이다. 윤 총장의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엔 3차장을 맡아 특수수사를 총괄했고, 윤 총장이 검찰 수장에 오른 뒤에는 과거 대검 중수부장 격인 반부패강력부장을 지냈다.

한 검사장이 떳떳하다면 감찰이나 수사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윤 총장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임했다면 이번 사건은 검찰사에 남을 ‘레전드’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윤 총장의 팔은 안으로 굽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꼼수를 연발했다.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대검 감찰부가 나서자 윤 총장은 이를 막고 자신의 통제 범위에 있는 인권부에 조사를 지시했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한 검사장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는 기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려 하자 윤 총장은 갑자기 전문수사자문단의 의견을 묻겠다고 했다. 당초 윤 총장은 이 사건과 관련해 “보고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터였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 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최종 책임을 진다. 검찰청법은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을 지휘·감독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검찰엔 직무 회피 제도가 있다. 검찰총장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검찰청공무원 행동강령은 ‘학연·지연·직연 등 지속적인 친분관계가 있어 공정한 직무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자가 직무(수사)와 관련이 있을 때 직무에서 회피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제반 사항들을 감안하면 추 장관이 비리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한 검사장을 업무에서 배제하고, 수사를 바로잡기 위해 윤 총장에게 지휘권을 발동한 것은 당연했다. 법 조문처럼 건조해야 할 장관의 수사지휘 과정에 감정이 실린 것은 문제지만 추 장관의 논리에 무리는 없었다.

윤 총장은 물의를 빚고도 사과나 반성이 없었다. 추 장관의 수사지휘에도 의견 수렴을 핑계로 시간을 끌었다. 전국의 검사장들을 일제히 불러들여 회의를 열면서 여론전을 펼쳤다. 자신의 잘못된 처신으로 인한 혼란을 정권의 검찰 길들이기 프레임으로 돌리려 한다는 시선도 있었다. 윤 총장의 버티기는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뒀다. 정권과 척졌다(혹은 척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해 야당의 대권 주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현직 검찰총장이 특정 정파의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윤 총장 개인에게는 명예로울 수 있어도 검찰 조직과 검사들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여권 인사에 대한 수사는 앞으로 편파 시비에 휘말릴 것이고, 조국 전 장관 일가를 상대로 벌인 기존 수사에도 불신이 더욱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윤 총장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윤 총장의 장점이다. 덕분에 검찰은 박근혜 정부에서 짓이겨진 체면을 그나마 살릴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를 높이 평가해 고검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에 발탁하고, 이후 검찰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번 사건을 보면서 윤 총장에 실망했고, ‘법꾸라지’ 우병우와 윤 총장이 백지장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품게 됐다.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검찰권 축소가 절실하고, 검찰의 제식구 감싸기를 막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윤 총장은 패했지만 승자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부터 보름 넘게 지속된 추미애·윤석열 주연의 ‘서초동 활극’은 짜증과 분노, 공포를 동시에 안겨줬다. 대검이 9일 추 장관의 지휘를 수용한다고 밝히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대검은 전날 윤 총장이 추 장관에게 건의한 독립수사본부 구성안은 법무부 검찰국과 사전에 합의한 것인데 추 장관이 거부했다고 폭로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용렬하다. 윤 총장은 지금이라도 성찰하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것이 검찰에 충성하는 길이고, 검사로서 명예를 지키는 일이다.

오창민 사회에디터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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