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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아무튼, 주말] 간헐적 단식, 간헐적 연애, 간헐적 천재까지… '간헐적'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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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헐' 왜 인기인가

지난달 20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효리가 방송인 광희에게 "간헐적 천재"라는 표현을 썼다. '가끔 천재'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어떤 단어건 '간헐적'이란 말을 붙이면 그럴듯한 신조어가 될 정도로 익숙해졌다. 간헐적으로 단식을 하고 간헐적으로 노동을 하며 간헐적으로 연애를 해서 간헐적 가족까지 만들며 간헐적 인생을 살아간다. 간헐적 전성시대다.

조선일보

최근 한 예능 방송에서 ‘간헐적 천재’라는 자막이 등장한 장면. / KBS2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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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헐적 단식, 간헐적 연애, 간헐적 가족…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간헐적(間歇的)'은 '얼마 동안의 시간 간격을 두고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열수와 수증기, 가스 등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온천을 '간헐천'이라고 하고, 가끔씩 아픈 상태를 '간헐통'이라고 한다. 일상 대화에 쓰는 표현도 아니고 구어(口語)보다는 문어(文語)에 더 가까웠다.

간헐적이란 표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것은 2013년 SBS 스페셜에서 '끼니반란'이란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후라는 게 다수설이다. 방송에서 소개한 '간헐적 단식'이란 식단이 유행을 하면서 간헐적은 친숙한 단어가 됐다. 단식이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 상태라면 간헐적 단식이란 하루 중 16시간 동안 공복을 유지하고 8시간 동안 두 끼를 먹거나 일주일 중 이틀 단식을 하는 것이다. 가끔씩 굶으면 되는 간헐적 단식이 체중 감량과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 이걸 체험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간헐적 단식의 유행이 사그라들지 않자 SBS는 지난해 말 '끼니반란 2.0'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간헐적 단식을 또다시 소개했다.

간헐적 단식 이후로 간헐적 채식이나 간헐적 운동도 나타났다. 간헐적 채식은 일주일 중 하루나 이틀을 채식만 하거나 세 끼 중 한 끼를 채식하는 것이다. 간헐적 운동은 고강도 운동을 10~20초씩 짧게 반복해서 5~6분을 채우는 운동법을 의미한다.

식단이나 운동 등 건강법에 주로 쓰이던 간헐적이란 단어는 연애나 노동 앞에도 붙어 세력을 확장했다. 원할 때 연애를 하지만 결혼에 뜻이 없으면 '간헐적 연애를 하는 비혼주의자', 돈이 필요할 때 '배달의 민족' 등 플랫폼 노동을 하거나 프리랜서들이 자조적으로 '간헐적 노동자'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쓴다.

가장 최근의 간헐은 '간헐적 가족'. 한집에서 각자 공간을 갖고 개인 생활을 보장받지만 공용 공간에서 함께 요리해 밥을 같이 먹거나, TV·영화를 모여서 보는 형태의 가족이다. 혈연으로 이어지거나 법적으로 보장을 받지 않은 가족이면서, 가족의 일부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간헐적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깊이 빠지지 않으면서 장점만 취하는 간헐

간헐적이란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이 단어가 무언가를 꾸준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깊이 빠지지 않으면서도 장점만 취하고 싶을 때 이 단어를 활용할 수 있다. 간헐적 채식을 하는 한다영(40)씨는 "채식이 몸에 좋단 얘기도 많이 들었고, 비건이 유행인 것도 알겠는데 고기를 아예 먹지 않고 살 자신이 없다. 그래서 채식 효과를 조금이라도 보고자 하루 한 끼 샐러드를 먹으며 간헐적 채식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단어의 유행은 2~3년 전부터 트렌드가 된 '느슨한 연대'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느슨한 연대란 한 집단의 구성원이 돼서 속박당하고 싶진 않지만 혼자만 있기는 싫은 사람들끼리 교류함을 의미한다. 취향을 공유하는 살롱이나 혼자 간 여행지에서 밥을 같이 먹을 동행을 구하는 커뮤니티 등 오프라인의 소규모 모임이 대표적이다. 간헐적 가족도 가족의 끈끈함이나 구속은 부담스럽지만, 일상의 일부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은 멀티 태스킹을 요구하는 시대여서 하나만 집중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간헐적으로 하게 됐다. 교수도 간헐적으로 연구하고, 간헐적으로 강의하고, 간헐적으로 칼럼을 써야 한다. 간헐이 유행한다는 것은 개인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났고, 여러 분야를 섭렵하며 균형감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고 했다.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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