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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만물상] 침묵으로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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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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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스티브 잡스가 애플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 섰다. “2년 반 동안 이날이 오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첫마디 운을 띄운 후 잡스는 무려 7초 동안이나 침묵했다. 청중들의 눈빛이 기대와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뒷날 그는 이렇게 적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프레젠테이션 룸.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그들을 내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갈 것인가?’ 잡스는 이런 침묵 화법을 자주 써먹었다.

▶아마 우연일 것이다. 그제 이원석 검찰총장도 검사장들 인사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7초간 말을 끊었다. 청사 앞에서 기자가 “사전 조율이 있었느냐” 묻자 그는 “어제 단행된 검찰 인사는…”이라고 입을 연 뒤 7초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나서 무거운 표정으로 “더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식의 보도가 불가피했다. 그의 침묵이 의도된 화법인지 해석이 분분했다.

▶TV에선 3초 이상 침묵하면 ‘방송 사고’로 친다. 일본어로는 ‘마(間)가 뜬다’고 한다. 이 총장이 무려(!) 7초간 말을 끊은 사이 실시간 중계를 하던 방송사 스튜디오에도 묘한 긴장감이 흘렀으나 사고라는 생각은 안 했다. 때로는 화려한 말재주보다 질의응답의 여백과 제스처 같은 ‘말 사이’에 훨씬 중요한 메시지가 담기기 때문이다. 말에 이격(離隔)을 두면 흡사 말굽쇠 공명처럼 듣는 이의 마음에 울림이 생긴다.

▶유명 정치인에게 ‘침묵의 달인’이란 별칭을 붙일 때가 있으나 보통 인터뷰 화법하고는 결이 다른 얘기다. 박근혜·최규하 전 대통령, JP 같은 분들이 정치적 난관을 헤쳐나갈 때 ‘침묵과 칩거의 정치 달인’으로 묘사되곤 했었다. 반대로 강준만 교수는 연전에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적 침묵’ ‘내로남불형 유체 이탈 화법’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2011년 애리조나 총기 사건 때 추도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8세 소녀를 언급하며 “이 나라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뒤 51초 동안 침묵했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심호흡을 했다. 침묵의 다른 이름은 경청이라고 한다. 공명을 일으키는 신호탄이라고도 했다. 엊그제 공개된 최신 AI 모델은 사람과 비슷한 속도로 대화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로봇이 인간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금세 알아차린다. 이원석 총장의 ‘7초 침묵’을 임명권자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했다.

[김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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