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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ESC]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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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설거지2]

불행을 삶의 동기로 만드는 나만의 해법

최소한의 객관화로 불행과 공생하기


한겨레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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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어렸을 때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 이후의 삶 또한 엉망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으며, 원망과 증오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질문을 받았다. 그에 관한 답이다.

도처에 불행이 있다. 불행은 발견되는 것이고 행복은 주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극복해보려 발버둥 쳐보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과 끝내 주저앉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규명해보고 싶지만 쉽지 않다. 불행의 양과 질을 계산할 수 없으며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불행에 대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검증 가능한 공식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배우자 때문에, 연인 때문에, 돈 때문에, 배신 때문에, 병 때문에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호소와 질문을 듣고 있으면 그래서 참담해진다. 나는 모른다. 나는 그 고통으로부터 당신이 당장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 도대체 그런 방법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얻을 수 있는 건 있을까. 과연 불행은 우리 삶의 동기가 될 수 있는가. 보다 나은 인간이, 보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향하는 발판이 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당신의 현재와 미래의 삶이 과거의 불행으로 인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아들러는 과거의 불행이란 곧 열등감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충분한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칼 포퍼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아이디어가 삶의 모든 문제를 트라우마 혹은 열등감 때문으로 퉁칠 수 있기 때문에 반증이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둘 다 사이비 과학이라 말할 것이다. 사제는 신에게 기도를 하면 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고 해병대 캠프 교관은 신체를 가혹하게 단련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 단언할 것이다.

질문자는 프로이트의 말을 경청한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특정한 불행에 의해 현재의 내가 결정되었고 돌이킬 수 없다면 앞으로의 불행에는 어떻게 대응해나갈 것인지 의문이다. 이 경우 영속적인 남 탓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어찌 됐든 나는 모두 가능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불행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을 얻게 되든 그것은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해보자.

젊은 날의 나는 대개 불행했고, 앞으로도 불행을 떨쳐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행복 하고 싶다는 마음에 잠식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사람은 거만했고, 거만해서 재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불행에 잡아먹히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골몰했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불행에 시달린 이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피해의식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피해의식이 만든 괴물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해받을 수 있다고, 아니 이해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불행했으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의 사연이 나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는 않는다. 그런 괴물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불행과 함께 살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자기혐오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 물론 사랑으로도 살 수 있겠지만 그건 여건이 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세요 사랑하세요, 같은 말을 떠벌이며 거만할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별일 없이 잘 산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 중에서.

이와 같은 해법은 놀랍게도 내게 잘 통했다. 오래전에 썼던 이 글을 다시 읽어보고는 사기를 친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힘들 때마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말 별일 없이 잘 살 수 있었다. 다만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에 관해서는 더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며 불행을 피할 수 없으니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수밖에 없다는 선언은 신비한 힘을 가진 주술이나 공식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개별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 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다.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낙인찍는 대신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요컨대 객관적으로 불행의 인과관계를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내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보다 더 큰 오만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제일 불행하고 제일 아프다는 생각에 둘러싸여 웅크리고 있는 게 쉽고 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대개의 경우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실제 벌어진 일과 다르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를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둘 다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당했는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생각하려면 객관화가 필요하다.

많은 이가 자기 객관화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주관적인 자기감정에 심취해서 현실에서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겪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역겨운 일들이 그런 이들에 의해 벌어진다. 불행에 관한 신비주의적 관점도 있다. 그들은 타인의 불행을 전염병처럼 취급하며 외면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위협한다. 오직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사람만이 타인의 불행에 관해서도 진심을 다할 수 있다.

물론 자신과 주변 세계를 완전히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문제는 이게 정말 어렵다는 점이다. 객관화에 성공한 경험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다면 어려울 게 없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경험 값이 유지되지 않는다. 다음 레벨로 갈 때마다 경험치가 0으로 돌아가 있다고 상상해보라. 매번 처음 다짐한 것처럼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어려운 것이다.

특히 젊은 날은 객관화가 어려운 시기다. 내 노력을 알아주는 조직도 어른도 드물다. 정당한 대가를 바랄 수도 없다. 타인에 관한 경험이 적어서 내 불행만이 굉장히 특별하고 잔인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 든다고 상황이 개벽하지 않는다. 여전히 내 노력의 가격은 형편없고 나의 헌신에 고마움을 표하는 이도 없으며 때로는 폄훼하고 뒷말을 하고 진심을 곡해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심지어 그게 내 가족일 때 사람은 크게 좌절한다. 실제 내게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가족으로부터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다.

그와 같은 삶의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을 때 상황을 객관화하기란 쉽지 않다. 객관이라는 말조차 떠올릴 수 없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부족해서가 아니다. 사람의 성향과 능력을 떠나 당연한 일이다. 괴롭고 화가 난다는 건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내 앞의 불행을 이기는 데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가 가능하도록 마음의 여유를 가능한 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라는 선언이었다. 당신에게 그건 다른 종류의 선언일 수 있고 어떤 표정일 수 있으며 특정한 여가활동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말 그대로 달아오른 마음이 식을 때까지 시간을 보내며 버티는 방식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만 통하는 객관화의 방법이, 사건과 나를 분리시켜주는 방아쇠가 반드시 있다. 여러분은 그걸 찾아야 한다.

편지를 보내온 질문자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해서 거만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태도로는 어렵다. 그건 삶에 관한 해석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거는 저주에 가깝다.

과거는 변수일 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보다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한다. 부디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내일을 모색해 내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리고 행복하길.

작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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