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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정동칼럼]미국의 구조화된 폭력을 보는 한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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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시민불복종 시위는 의도하지 않게 일부 파괴와 폭력성을 동반하기도 한다. 폭력성을 옹호해서는 결코 안 되지만, 그것을 빌미로 평화적 시위의 본질을 매도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6월2일 트럼프가 보여준 행태는 이런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말았다.

경향신문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백악관 로즈가든에 선 트럼프는 시위대를 싸잡아 테러집단으로 몰아붙였다. 자신은 법과 질서를 지키는 대통령으로서 나약한 주지사들을 대신해서 연방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겠다고 선언했다. 군과 경찰이 섞인 진압대는 트럼프의 연설을 기다리던 평화시위대를 향해 무차별로 최루탄을 발사하며 강제해산 작전에 돌입했다.

지금 미국 주요 도시들은 인종차별과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저항의 물결로 가득 차 있다. 지난주 CNN 앵커 쿠오모는 이 시위가 단지 흑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보통의 시민들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적어도 삼일째 되는 날까지 시위는 평화 속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방송 화면을 채우고 있는 활활 타오르는 로스앤젤레스 거리는 문제의 본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숨 쉴 수 없다”던 플로이드의 목소리는 이런 혼란들 틈에서 어느덧 ‘진압되어야 할 폭도’의 이미지로 변해버렸다. 평화적 시위 장면은 어느새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도심의 불타는 장면은 공교롭게도 한국계로 보이는 현장기자에 의해 생중계되었고, 보도되는 약탈의 현장은 그대로 1992년 흑인폭동 당시 피해의 중심에 있던 한국 상점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때까지 트럼프는 주지사와 시장들의 등 뒤에 숨어 있었고, 시위대 역시 규모가 커지면서 질서를 잡지 못했다. 그사이에 약탈과 파괴가 뒤섞여 들어오면서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혼란은 극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책임져야 할 자들은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화염과 연기가 만드는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밤이면 경찰과 주방위군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CNN 기자는 미니애폴리스에서 이 의문점을 집요하게 언급한다. 그렇게 사흘 나흘이 지나가는 순간 어느새 약탈이 시작되었고 새벽이 되어서야 경찰은 진압에 들어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초기에는 상점의 유리창이 깨진 곳에서 시위대가 경비를 서기도 했다지만, 그들이 주도하던 공식 집회가 마무리된 이후 시위 양상은 다시 급변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베벌리힐스 로데오 거리의 상점들이 약탈당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도 경찰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어쨌든 경찰은 정면충돌을 피했고, 상황은 의도치 않은 무질서로 흘렀다. 복잡계의 전형적 현상이 나타났고, 사태는 어느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폭도로 낙인찍혔고, 트럼프는 무력진압을 시작했다.

이 사태가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미국이라는 사회는 이런 갈등을 대화로 풀 수 있는 사회적 포용력을 잃어버렸고, 이 과정을 이끌 리더들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인종차별과 박탈감이 코로나19와 대량실업 사태를 만나면서 점화되었다. 폭력과 차별이 인내할 수 없는 선까지 구조화되었을 때 개선의 희망은 사라지며, 인내하는 시민의 성숙성은 근거를 잃게 된다. 증오와 대결의 구도만 남는다.

나를 보호해줘야 할 경찰이 내게 총을 겨누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의 표적이 되는 사회라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사회보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기댈 데가 없고 엄청나게 비싼 건강보험에 들지 않으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다면 그건 이미 희망이 꺼져버린 사회이다. 그런 사회 한가운데 소수 인종들이 버려져 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끔찍한 인종차별과 가난이라는 바이러스가 수대에 걸쳐 이들을 흔들고 있다. 그들을 약탈자로 부르기 이전에 과연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나 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런 사태를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희망’이 사라져버린 사회를 강요받고 있다. 무차별 경쟁과 계급 간 간극 속에서 투잡, 스리잡을 강요받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의 금수저, 흙수저 논쟁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이들에게 사회적 포용력과 재분배의 가능성을 주는 정치력이 요구된다. 교육전문가인 필자가 왜 이런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답은 분명하다. 분배 문제의 해결이 없는 교육개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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