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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장경덕 칼럼] 헬리콥터 머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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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어느 날 우리 동네에 헬리콥터가 날아와 1000달러를 뿌린다고 해보자.' 통화주의 경제학의 아버지 밀턴 프리드먼이 반세기 전에 제시한 사고실험이다. 헬리콥터 머니 구상은 2000년대 초 디플레이션의 덫에 빠진 일본 경제를 구할 방책으로 관심을 모았다. 그 효과를 주장한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헬리콥터 벤'으로 불렸다. 이제 팬데믹 시대 디플레이션 공포가 그 아이디어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중앙은행은 글로벌 금융위기 후 양적완화(QE)로 엄청나게 돈을 풀었다. 이들이 사들인 자산은 위기 전의 네 배인 18조달러에 이른다. 하지만 그 돈은 실물경제로 흐르기보다 자산시장 거품을 더 부추겼다. 그래서 무차별 통화 살포보다 재정으로 꼭 필요한 곳에 돈을 찔러주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로 사들인 국채는 정부가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다. 양적완화는 간접적이고 한시적으로 재정을 돕는다. 하지만 헬리콥터 머니는 영구적이고 직접적인 재원이다. 헬리콥터 머니를 주창하는 이들은 달콤하게 속삭인다. '중앙은행은 정부가 펑펑 쓸 수 있게 열심히 돈을 찍어대기만 하면 된다. 정부는 국채 원리금을 갚으려고 세금을 더 걷거나 다시 돈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인플레이션 따위는 잊어버려라. 지금은 되레 디플레이션 공포가 커지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말로 발권력으로 재정 적자와 부채를 해소하는 화폐화(monetizing)에 대한 오랜 금기를 깨버릴 때다.'

이 급진적인 생각은 코로나19 바이러스만큼이나 빠르게 퍼질 것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행 자금순환 통계상 작년 말 가계 부문 금융부채는 1879조원, 일반정부 부채는 1008조원에 달했다. 가계빚은 작년 GDP(1919조원)와 맞먹고 나랏빚은 GDP의 절반쯤 된다. 한국의 정치권이나 대중 역시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재정 확대를 갈급해한다. 재정 적자와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 빚을 해소하는 길은 세 가지다. 하나는 세금을 더 걷어 빚을 갚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증세론을 편다. 하지만 제대로 세수를 늘리려면 중산층 증세가 필요하다. 이는 정치적으로 밀어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껏 우리나라의 증세는 소수의 부자나 대기업을 겨냥한 핀셋 증세나 인플레이션에 따라 저절로 과세구간이 높아지는 스텔스 증세에 머물렀다. 일반 증세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두 번째는 그냥 빚을 갚지 않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처럼 디폴트로 가면 자본시장에 발 붙이기 어려울 터이므로 이 역시 비현실적이다. 복지 확대 공약을 지키지 않는 것도 사실상 부도를 내는 것인데 물론 정치적으로 선택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끌면서 인플레이션 효과로 자연스럽게 빚의 실질적인 무게를 줄여가는 길이 있다. 정치적 부담이 가장 작다. 그만큼 헬리콥터 머니의 유혹도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과연 헬리콥터 머니는 공짜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묘책일까.

지난날 중앙은행은 종이돈을 금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오늘날 중앙은행은 오로지 독립적이고 절제 있는 정책으로 통화 가치를 지켜야 한다. 무절제한 재정정책을 발권력으로 뒷받침하려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물론 지금처럼 디플레이션 압력이 클 때는 통화정책 역시 충분히 과감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위기의 규모와 강도에 비례해야 한다. 경제가 당장 결딴날 지경이라면 마이너스 금리든 헬리콥터 머니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마지막 수단이다. 비례의 원칙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물가를 안정시키면서 성장을 뒷받침해야 하는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독트린이 돼야 한다. 정부가 불가피하게 적자와 부채를 늘릴 때는 믿을 만한 출구전략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지금은 헬리콥터 머니가 가져다줄 공짜 점심의 미몽에 빠질 때가 아니다.

[장경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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