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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내 나이 54살, 장래 희망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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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도/시니어 연기자에 도전하는 사람들]

애를 키우다 보니 어느새…

가장 노릇·육아에

온 세월 보내고

덩그러니 남겨진

청춘시절 ‘내 꿈’

더 늦기 전에

도전·변화·배움의 길로

인생 2막에 쏟아붓는 열정

연기·탭댄스 학원 찾아다니며

‘해야 할 일’ 아닌

‘하고 싶은 일’에 마음 쏟아

대본 외우며 감정 잡고

강렬한 눈빛 연기 발사

드라마·영화·연극 무대 올라

내 안에 숨어 있던 끼

마음껏 발산하며 행복 느껴

“출연료보다 교통비 더 들고

연기자 되지 못해도 좋아

꿈 향하는 길 자체로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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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내가 못 할 것 같아?”

탁자를 쾅 치며 쏘아붙이는 이선덕(54)씨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섰다. 건너편 남자를 향한 눈빛엔 분노, 설움, 오기 등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듯했다.

“네, 좋습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훨씬 좋아요. 까만 글씨만 열심히 봐선 안 됩니다. 나눠드린 대사를 읽으며 속뜻을 찾아야 해요. 까만 글씨 밑에 있는 걸 봐야 흉내가 아니라 진심으로 연기할 수 있어요.”

지난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유앤와이컴퍼니. 지난 4월 개강한 ‘시니어 연기 과정’ 1기 수업이 한창이었다. 차성준 강사를 중심으로 수강생 7명이 둘러앉아 대본 리딩을 하고 있었다. 수강생 평균 나이는 50대 중반. 50살부터 62살까지, 각기 다른 인생의 길을 걸어온 이들이 뒤늦게 연기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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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연기학원 시니어 연기 수업 현장에서 수강생들이 대본 리딩을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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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덕씨는 19살 무렵부터 연기의 꿈을 품었다. 배우, 모델, 패션 등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서울 명동에 놀러 갔다가 ‘길거리 캐스팅’돼 명함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하지 못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을 한 오빠는 엄했다. 동생이 연예계로 가는 걸 강하게 반대했다. 1980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일찍 결혼해 딸 셋 낳아 키우다 보니 세월이 다 갔더라고요. 작년에 막내까지 대학 보내고 나니 딸들이 그러더군요. ‘엄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도전해봐.’ 여기 학원에 등록해준 것도 딸이에요. 처음엔 모델 워킹을 8개월 정도 배웠는데, 모델도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연기를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요즘 본격 연기 수업을 통해 진심으로 그 사람이 돼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배우는 중이에요.” 그런 마음가짐에서 좀 전의 대사와 눈빛이 나왔으리라.

뒤늦게 꿈을 좇아 시니어 연기자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아역이나 젊은 연기자 지망생을 교육하는 연기학원들이 최근 앞다퉈 시니어 연기 과정을 만들고 있다. 고려대 평생교육원도 올해 1학기부터 시니어 모델연기 강좌를 개설했다. 1학기에는 모델에, 2학기에는 연기에 중점을 두고 교육한다. 고려대 평생교육원 강사이자 유앤와이컴퍼니 대표인 이나영씨는 “50대 후반, 60대 초반이 돼 어느 정도 삶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면서 배움·도전·변화를 꿈꾸며 모델이나 연기에 관심을 두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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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연기학원 시니어 연기 수업 현장에서 김형수씨가 대본 리딩을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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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62)씨는 2018년 평생을 몸담아온 공직에서 은퇴했다. 외교관이던 그의 마지막 근무지는 주말레이시아 한국대사관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지난해 에스엔에스(SNS)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몇 장 올렸다가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다. 홈쇼핑에서 재킷 시니어 모델이 급히 필요하다며 출연을 요청했다. 얼떨결에 홈쇼핑에 나간 걸 계기로 광고 몇 편에 출연하게 됐다. 그러다 오달수 주연의 독립영화 <요시찰>에도 캐스팅돼 재벌 회장 역으로 촬영을 마쳤다.

“주변에 은퇴한 친구들을 보면 대개 우울해 해요. 노후 준비도 제대로 안 돼 있고, 젊은 세대와 갈등도 겪고요. 저는 영화 촬영장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어요. 튀는 색깔로 머리 염색을 하고 피어싱까지 한 코디네이터가 있었는데, 그렇게 일을 잘할 수가 없더라고요. 젊은 세대에게 가졌던 막연한 편견을 없애줬어요.”

그는 영화를 통해 자신과 같은 은퇴 세대에게 희망을 주고 세대 간 갈등을 해소하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좀 더 실력을 쌓아 자신도 즐겁고 사회에도 공헌하고자 연기학원 문을 두드렸다. 이날 그는 손짓까지 열심히 해가며 제법 긴 독백 연기를 했다. 차성준 강사는 “저번보다 대사들이 더 잘 이어지는 것 같다”며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면서 보통사람의 감정에 정서적인 공감을 하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곳 말고도 또 다른 연기학원과 탭댄스학원에도 다니며 인생 2막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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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모델 1호 김칠두씨. 인스타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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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연기자보다 먼저 붐을 일으킨 건 시니어 모델이다. 2018년 서울패션위크 런웨이에 서면서 국내 시니어 모델 1호가 된 김칠두(65)씨가 시초다. 20여년간 운영하던 순댓국집 문을 닫은 뒤 딸의 권유로 63살 나이에 모델에 도전한 그의 이야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에게서 용기를 얻어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고, 관련 교육과정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나영 대표는 “모델의 장점은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라며 “꼭 키가 크거나 하지 않아도 자신감과 개성이 있으면 충분히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니어 모델에 대한 관심이 요즘 시니어 연기자로 이어지고 있다. 처음엔 문턱이 낮은 시니어 모델로 시작했다가 점차 연기력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나영 대표는 “모델도 기본적으로 연기력이 필요하다”며 “모델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연기를 접한 뒤로 아예 연기를 더 깊이 파고들겠다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외향적이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 분들이 모델을 선호한다면, 내향적이고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싶어하는 분들은 연기를 선호하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시니어 연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이도 있다. 박서영(53)씨는 딸이 예고 진학을 위해 연기를 공부하는 걸 옆에서 보며 ‘나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딸과 함께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연기 수업을 들은 그는 단역배우가 됐다. 한국방송(KBS) 드라마 <최고의 한방>, 티브이엔(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솔로몬의 위증> 등에 카페·마트 손님, 부잣집 학생 엄마 등으로 출연해 짧은 대사도 소화했다. 그는 연기력을 갈고닦는 동시에 일도 소개받고자 꾸준히 연기학원을 다니고 있다.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뿐 아니라 웹드라마, 바이럴 광고 쪽에서도 시니어 연기자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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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엔(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에 단역으로 출연한 박서영(오른쪽)씨. 왼쪽은 배우 라미란. 텔레비전 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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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를 준비하는 이도 있다.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온 최영(59)씨는 지난해부터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극단 겸 연기학교 퀀텀앤플레이에 다니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일에 파묻혀 지내온 그는 요즘 업무량을 줄이는 대신 합창단과 연기학교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정신없이 일만 하다 보니 어느새 시니어가 됐더라고요. 나이 먹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싶었는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해보니 너무 재밌고 행복해요.” 그는 오는 8월 열리는 근로자연극제에 참가하기 위해 맹연습 중이다. 20~30대 배우들과 매주 두 차례씩 연습하는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진단다. 연극제에 앞서 6월13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마을극장에서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첫 무대에 설 예정이다.

이들의 목표는 유명 배우가 아니다. 작은 배역이라도 뭔가를 해낸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다. 이나영 대표는 “시니어 연기자들은 큰 배역을 맡고 돈을 많이 벌기보단 과거에 발산하지 못한 끼를 뒤늦게 펼치는 데서 행복을 느낀다”며 “출연료보다 교통비가 더 들어도 즐겁게 단역 출연을 하는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차성준 강사는 “시니어 연기과정에서 가르치는 게 처음인데, 이분들의 열정과 진지한 자세에 놀랐다”며 “다른 데서 가르치는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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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연기학원 시니어 연기 수업 현장에서 수강생들이 무더운 사막을 걸어가는 즉흥연기를 펼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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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때 우울증까지 겪었거든요. 앞으로 살아도 딱 이만큼일 텐데,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무슨 상관일까 싶었죠. 그런데 여기 와보니 너무 살맛이 나요. 설령 연기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 꿈을 향해 가는 게 즐거워요. 앞으로 20년은 더 살 테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보려 합니다.” 아들이 등 떠밀어 연기학원에 왔다는 안주암(56)씨의 말이다.

인생이란 연극의 두 번째 막은 이제 막 올랐고, 이들은 누가 뭐래도 이미 성공한 주연배우들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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