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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김군’들 주검 실은 군트럭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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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최진수씨, 40년간 동료 주검 행방 찾아

광주교도소 끌려간 강길조씨는 52명 사망 목격

행불자 78명…5차례 암매장 조사는 성과 없어

5·18조사위 “실종자 규모와 암매장 규명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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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4일 광주시 남구 송암동에서 계엄군에게 총살당한 뒤 지금까지도 주검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시민군 김아무개씨. 김씨의 사연은 지난해 개봉한 영화 <김군>으로 재조명됐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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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희생자 규모와 실종자 행방, 발포명령자 등 ‘5월의 진실’은 여전히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5·18 피해자 가족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진상규명의 필요성과 남은 과제 등을 3차례에 걸쳐 싣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1초의 망설임이었다.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치는 계엄군의 살벌한 눈빛 앞에서 5·18 시민군 최진수(당시 17살)씨가 잠시 머뭇거린 사이 김씨 성을 가진 동료가 앞으로 나갔다. 하사 계급장을 단 군인 한명이 오더니 M16 소총으로 김씨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쏜 뒤 최씨 머리를 겨눴다. 그때 한 대위가 나타나 “집 안에서 죽이면 시끄러우니 일단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군인들은 최씨를 총살하는 대신 다른 시민군 3명과 함께 공수부대 본부중대로 끌고 갔고, 최씨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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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에서 만난 최씨는 “5월24일 도청 지도부의 지시로 동료 11명과 트럭을 타고 송암동에 가는 길에 11공수여단 장갑차와 마주쳤다. 장갑차는 캘리버50 기관총을 난사했고, 우리는 인근 주택으로 삼삼오오 흩어져 피신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최씨는 이어 “집 안방에 숨어 있는데 40여분간 엄청난 포성과 총성이 들렸고 멀리서 ‘사격 중지’ 소리와 함께 잠잠해졌다. 바깥 상황이 궁금해 창호지 문을 뚫고 내다보니 군인 40여명이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고 말했다.

최씨가 피신해 있을 때 났던 포성과 총성은,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를 육군보병학교 교도대가 시민군으로 오인해 공격하면서 일어난 교전 때문이었다. 군인 9명이 즉사하고 33명이 부상당한 ‘송암동 오인사격’ 사건이다. 자기들끼리 총질하다 사상자가 발생하자 계엄군은 애꿎은 민간인에게 화풀이했고, 김씨 성을 가진 시민군도 이 과정에서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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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국회 광주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제출된 ‘송암동 양민학살 요도’. 최진수씨 제공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최씨는 1980년 7월1일 현장검증을 위해 송암동을 다시 방문했을 때 주민들에게 김씨 주검의 행방을 물었단다. 주민들은 군인들이 김씨 주검을 방치하고 떠나자 마을 인근 금당산에 가매장했는데, 5월31일 군인들이 다시 와 수습해 간 뒤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해 10월 석방된 최씨는 김씨가 본인 대신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꼭 제사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1989년 국회 광주청문회,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을 찾아 김씨 주검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요청하고 현상금 500만원까지 걸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김군>에 출연한 까닭도, 광주공원에 김씨 동상을 세우려는 계획도, 모두 김씨를 찾기 위해서였다.

최씨는 “5·18 직후 김씨와 함께 움직였던 동료들을 수소문했지만 모두 사라졌다. 당시 투입됐던 군인들이 지금은 많아야 60대 중반일 텐데 꼭 진실을 밝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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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시민군 출신 최진수(왼쪽 둘째)씨가 자신을 대신해 계엄군에게 총살을 당한 동료 김아무개씨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하고 있는 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최진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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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에 참여했다가 5월20일 전남대학교 앞에서 3공수여단에 붙잡힌 강길조(당시 38살)씨는 옛 광주교도소에서 숨진 52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씨는 “5월21일 3공수여단이 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11명이 질식 등으로 죽었다. 군인들이 주검의 가슴에 번호가 써진 판자를 놓고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시위대 100여명과 함께 교도소 안 가마니 제작공장에 갇혔다. 5월31일께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갈 때까지 매일 사람이 숨졌고 군인들은 새벽마다 헬기로 주검을 실어날랐다. 강씨는 종잇조각에 바를 정(正) 자로 기록한 주검 수는 이송 과정에서 숨진 11명을 포함해 52명에 이르렀다. 강씨는 “교도소 밖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땅에 묻었을 테니 희생자 수는 더 많을 것이다. 나이 여든이지만 5·18 진상규명은 꼭 보고 세상을 뜨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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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조씨가 1980년 5월21일 계엄군 트럭 짐칸에 실려 광주교도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최루탄 가스 때문에 몸부림을 치다 생긴 머리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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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행방불명자 소재는 발포명령자 규명과 함께 5·18 진상규명 양대 과제로 꼽힌다. 현재 광주시가 인정한 행방불명자는 78명, 인정받지 못한 수는 242명이다.

행방불명자는 암매장 의혹과도 직결된다. 11공수여단 62대대 하사 출신 김아무개씨는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62대대장 인솔 아래 일부 병사들이 보병 복장을 하고 광주로 가서 가매장지 발굴작업을 한 것으로 안다”고 증언해 계엄군이 가매장한 주검을 은밀히 수습했다는 의혹은 기정사실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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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30일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터에서 5·18 행방불명자를 찾기 위한 암매장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광주시와 5·18기념재단 등은 2002년부터 다섯차례에 걸쳐 행불자 암매장 조사를 했지만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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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와 5·18기념재단 등은 2002~2003년, 2006~2007년, 2009년, 2017년, 올해 등 다섯차례에 걸쳐 암매장 조사를 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고, 전두환씨 등 신군부는 여전히 암매장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2일 성명을 내어 “행방불명자의 규모와 소재를 확인하고 암매장과 사체유기 가능성 등의 진상을 밝혀내겠다”고 밝혔다. 과연 이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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