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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들국화는 위안부 할머니가 우선이었다" 위인전같은 논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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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같이 열던 김향미씨 석사 논문

조선일보

더불어시민당 윤미향 당선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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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는 경상남도 남해의 가난한 농사꾼의 4형제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친척집 작은 방에 얹혀살았다. 새벽일을 나가시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장녀인 그는 집안일을 했다”(63쪽)

위인전(偉人傳)이 아니다. 자서전(自敍傳)도 아니다. 김향미 수원평화나비 공동대표가 지난해 8월 쓴 석사학위 논문의 일부다. 여기서 ‘들국화’는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국회의원 당선자를 지칭한다.

김 대표가 아주대 교육학대학원에 제출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실천활동가의 여성주의 인식전환경험’ 논문에는 윤 당선자의 생애사(史)를 관찰과 면담 방식으로 연구한 내용이 담겼다.

논문 초록에서 김 대표는 “죄인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피해 할머니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아픔을 말하고 가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윤미향은 진심을 다해 도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일보

/국회도서관


해당 논문은 윤 당선자의 삶을 3부로 나누어 기술한다. 유년기부터 학창시절, 대학 생활, 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 활동 등으로 나뉜다.

윤 당선자의 삶을 기술한 부분에서 논문은 윤 당선자를 ‘윤미향’으로 지칭하는 대신 ‘들국화’로 쓰고 있다. 논문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름을 꽃으로 표기했는데, 윤 당선자 역시 “이름 대신 (윤 당선자가) 좋아하는 꽃으로 표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들국화는 퇴근 후 집에 오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본인의 개인적인 생활을 내팽개치고 주말, 휴일도 없이 할머니들을 만나고, 가면 또 무시도 당하고, 의심도 받고, 할머니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못하는 것을 들국화는 알 것 같다고 하였다”(97쪽) 같은 식으로 쓰여 있다.

내러티브(narrative) 탐구 방식으로 쓰인 이 논문은 윤 당선자의 인생 경로를 쫓으며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3부, 윤 당선자가 1992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간사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윤 당선자의 활동을 칭송하거나 우상화(偶像化)하는 투의 서술이 많았다.

“들국화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일을 만들게 된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건립인 것이다”(86쪽)
“그래서 들국화는 이 운동을 이 활동은(을) 멈출 수가 없다. 들국화의 움직임은 사명감으로, 의무감으로 부채로 실천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88쪽)
“들국화의 운동방식은 자신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피해 할머니들, 단체가 더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 운동 속에는 들국화가 자리 잡고 함께 있었다”(113쪽)

논문 작성자인 김 대표가 소속된 수원평화나비는 정대협, 정의연과 연대하며 그간 수요집회를 주관해왔다. 김 대표의 자제는 올해 4월 정의연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작년과 올해 200만원씩 김복동장학금을 받은 국내 대학생 수혜자는 총 35명으로 모두 시민단체·노조 등 관련 인사의 자녀였는데, 김 대표의 자제도 여기에 포함됐다.

수원평화나비의 활동은 윤 당선자의 남편 김모씨가 운영하는 ‘수원시민신문’에도 꾸준히 기사로 올라왔다. 2014년 4월엔 ‘수원평화비건립추진위 모금활동 눈물겨워’라는 제목으로 윤 당선자 남편 김씨가 직접 기사를 쓰며 수원평화나비 활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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