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서울 옥인동 주민이자 서촌 문화지킴이를 자처하며, 1990년대부터 한국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국민신탁운동)의 회원 및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동강댐 취소, 굴업도 골프장 반대 등 환경 살리기 캠페인에 적극 참가했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 집 한쪽에는 온돌방 한 칸, 마루 두 칸의 삼칸 한옥이 있다. 외지에서 헐린 한옥을 옮겨와 손만 봤다. 그는 바우하우스 창설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사는 데는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1인 가구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지는 21세기 한국 사회는, 50여 년 전 1가구 5명 기준의 국민주택 규모 85㎡도 훨씬 더 줄어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20대의 젊은 건축가 김원은 1972년 대학 2학년 승효상이 읽은 '현대건축, 1970년 발간'에서 "철저한 모더니스트. 권위를 거부했으며, 상징을 배격했고, 타협을 타락으로 간주했으며, 반이성과 비합리를 증오", "주택에서 도시까지, 전통에서 현대까지, 기술과 문화와 우리들의 올바른 삶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는 거침이 없는 인물이다. 김원은 대학 졸업 후 김수근 사무실에 적을 두었다. '건축철학' '공간 심리학' 등의 일어 원서를 읽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다.
김원은 1976년 사간동에 건축사무소 '광장건축'을 열었으나 일거리가 없었다. 이후 5년간 사진작가 임응식·강운구·주명덕과 함께 '한국의 고건축'(전 7권)을 만들었으나 적자를 면치 못했다.
조선호텔 아케이드 확장 계획에 초청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걸지는 못했고 지하 설계와 전체 계획에 국한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시절, 대학원에 재학 중인 직원들에게 논문으로 풍수에 대해 써보라고 권했고, 한자 공부 등 본격적인 스터디그룹으로 발전했다. 책 출판과 언론을 통해 '서울 공대 출신의 젊은 풍수전문가'라는 소문은 그를 불과 몇 년 뒤 '5공 건축가'라는 닉네임을 붙여주기에 이른다.
코엑스몰 전경 /사진=코엑스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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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한국종합전시장(지금의 코엑스) 공모에 1등 당선(정림건축 합작)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경쟁업체는 공간, 희림이었다. 정림이 김원을 초빙한 것은, 캐나다 몬트리올 엑스포(1967)와 일본 오사카 엑스포(1970) 전시장 설계에 김수근의 스태프로 참여한 경력 때문이다.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강 성당(1980)은 파벽돌의 특성을 강조해 세밀한 기능 할애, 형태 구성으로 질박한 친근감을 일으킨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당 내부의 공간 구성은 철파이프 트러스를 노출해 장식적 요소를 강조했다. 김원은 한강 성당을 설계하면서, '종교 건축은 가장 단순한 것을 목표로 하지 뭔가 의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한강 성당은 건축가 김원이 향후 종교 건축물을 설계할 때 규범으로 삼는다. 성당 건립을 하면서 발주자인 주임신부는 사정 기관에 구속되어, 기존 상가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건축가와 건축주와 시공자를 겸했다. 그는 건축뿐만 아니라 조경, 인테리어, 가구, 사인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조각가, 공예가, 유리 화가를 선정해서 교회 미술품을 만들어 배치해야 했다.
그 이후에 이어진 샬트르 바오로 수녀원과 계성여고, 계성초교를 포함한 명동 계획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명동성당 뒤편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는 기존 수녀회 건물의 개·보수를 중심으로 설계하였다. 수녀회 성당은 신축하였다.(1982)
전두환 정권은 권력의 정통성 부재로 고민하던 중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불어닥친 항일, 극일 운동을 국가 프로젝트로 연결시켰다. 그게 독립기념관이다.
독립기념관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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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은 정부에 충남 천안시 흑성산 앞쪽 독립기념관(1987. 9. 15 준공) 터를 찾아줬다. 이러한 일은 엄밀하게 건축가의 영역은 아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용지를 찾아주기도 했다. 이쯤 되면 그는 기인에 가깝다. 김원은 5년여간 용지 선정에서부터 마스터플랜 작성(1984), 기본계획 소위원회 위원으로 현상 설계 공모 과정을 지휘했다.
김원은 국립국악원을 수의 계약한 후 통일연수원, 국립종합촬영소, 남원의 민속국악당, 용산 미군기지 이전지 복합문화공원 등 대형 프로젝트를 잇단 수의계약으로 설계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풍수로 시작된 독립기념관의 인연으로 얻어진 수확이었다.
국립국악원 /사진=wikipe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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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IC에서 남부순환로 좌측 우면산 자락에 자리한 국립국악원은 예술의전당과 트여 있지만 다른 방향은 막힌 형태이다. 남부순환로를 예악당과 연습사무동으로 막고, 내부의 마당을 '지켜낸' 듯한 인상이다. 전통 사찰의 가람배치 방식이다. 5만8874㎡(1만7809평)의 대지에 전체 건물을 화강암으로 마감했고, 정방형의 건물 위로 전통 양식을 간명하게 처리한 처마를 적용했다. 국립국악원은 10년에 걸친 프로젝트이다.
재미 건축가 김태수(1936~ )가 설계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1986) 건물이 거의 완공될 즈음, 건물 가운데 나선형 모양 로비홀(램프코어)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닮았다는 평이 나왔다. 아시안게임에 이어 88올림픽을 앞둔 국가주의가 팽배하던 때였다. 문화관광부 관료들은 대안이 필요했다. 천호선 예술국장(전 쌈지길 대표)이 백남준(1932~2006)에게 작품을 요청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이 미국, 프랑스, 독일에 생중계되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질 때다. TV는 물론 모든 기자재와 인력을 제공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백남준은 멀티채널과 멀티플랫폼 시대에 대한 예술적 은유 작품을 구상했고, 형태적으로는 탑을 구상했다. 문제는 TV를 높게 쌓아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TV는 브라운관이라 엄청 무거웠고 공간과 상생할 수 있는 조형적인 가치를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백남준은 천호선의 경기고 동기인 김원을 소개받았다.
김원은 1003개의 TV를 쌓는 탑의 전체 설계를 담당했다. 바닥을 뚫고 지하 암반까지 기초공사를 했다. 기존의 나선형 계단이 마치 작품 감상을 위한 관람로로 평가받았다. 1988년 준공된 작품명에 '작가는 남준 백, 디자인은 김원' 이렇게 쓰자 했다. 다다익선은 공동 작품인 셈이다. 김원은 다다익선 복원과 관련, '불 꺼진 다다익선' 옆에 원래 모습의 '다다익선'을 새로운 비디오로 보여주면 미술관의 일은 끝난다고 본다. 원래 백남준이 보여주고 싶어 했던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지 않았겠냐는 생각이다.
김원은 전두환 정권이 프랑스 그랑프로제를 모방한 5대 프로젝트인 독립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 국립국악원에 자문위원이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가 '5공 건축가'로 불리는 이유다.
[프리랜서 효효]
※참고자료 : 인터넷 웹사이트 http://www.kimwona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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