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가격을 기록하며 원유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사진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5월물 선물 가격이 급락한 모습. <한주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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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스 유가는 어떻게 나왔나
▷원유 실물 저장할 곳 없어 ‘슈퍼 콘탱고’
국제유가의 마이너스 가격은 도대체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WTI 선물 가격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을 이해하려면 유가 선물 거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유가 선물 거래는 거래 당사자 간 서로 약속한 날짜에 실물을 주고받기로 계약하는 행위다. 예를 들어 5월물(근월물) 선물을 들고 있는 투자자가 투자를 이어가려면 6월물(원월물) 선물로 이를 교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롤오버(선물 교체)’ 비용이다.
문제는 코로나19 여파로 원유 수요가 곤두박질쳤다는 데 있다. 실물 원유 수요 감소가 원유 선물 가격 마이너스로 이어진 과정은 이렇다. 원유 투자 포지션을 청산하려는 투자자는 약속된 날짜에 원유를 실물로 정산해야 한다. 그런데 석유정보업체 젠스케이프에 따르면 WTI 선물의 실물 인수 지점인 오클라호마 쿠싱의 원유 재고는 지난 4월 17일 기준 최대 저장치의 77%에 달했다. 5월 첫 주면 더 이상 원유를 저장할 공간이 없을 것이란 전망이다. 원유 재고를 쌓아둘 곳이 없다는 것은 선물 포지션을 청산하고 이를 실물로 정산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5월물 선물을 들고 있는 투자자들이 이를 청산할 방법이 없자 6월물 선물 수요가 폭증했다. 투자 용어로는 이런 상태를 ‘슈퍼 콘탱고’라고 부른다. 만기가 가까운 달의 선물보다 만기가 먼 달의 선물 가격이 훨씬 비싼 상태를 일컫는다. 거꾸로 만기가 먼 달의 선물 가격이 가까운 달의 선물 가격보다 더 싸다면 이를 ‘백워데이션’이라고 부른다.
▶레버리지 ETN ‘미친 프리미엄’
▷막연한 대박 좇다 결국 탈 나
국제유가 선물 시장에서 슈퍼 콘탱고가 빚어지자 국내 시장에서는 이보다 더 난리가 났다. ‘언젠가 오르겠지’라는 막연한 대박심리에 젖어 개인투자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면서 원유 레버리지 ETN 투자는 결국 탈이 났다.
국내 시장에서 가장 거래가 많이 이뤄지는 상품인 ‘신한 레버리지 원유 ETN’은 지난 4월 22일 650원에 장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 ‘650원’이라는 가격은 사실상 기초자산의 가격이 전혀 반영되지 못한 허울뿐인 가격이다. 배경을 풀어보면 이렇다.
원유 레버리지 ETN은 국제 원유 선물 시세의 2배를 좇도록 설계됐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별문제가 없다. 증권사는 ETN 거래에서 매수·매도 호가를 내며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한다. 즉, A라는 투자자가 100원에 매수 호가를 내면 증권사는 호가만큼 물량을 공급해 거래 체결을 돕는다. 하지만 유가 급등을 노리고 투자자들이 단기간에 몰려들면서 사달이 났다. 증권사가 유동성 공급을 위해 시장에 유통시켰던 물량이 얼마 못 가 바닥났다. 신한 레버리지 원유 ETN은 증권사 개입 없이 오로지 개인투자자 간 거래만으로 시장가격이 형성됐다.
개인투자자끼리 ‘핑퐁’처럼 호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괴리율’이 초래됐다. 원유 선물 ETN은 원유 선물의 지표가치(IIV)를 추종하도록 설계됐는데, 괴리율은 ETN의 시장가격과 지표가치의 차이를 나타내는 비율이다. 괴리율이 플러스라면 시장가격이 ETN의 본질적 가치인 지표가치보다 비싸다는 의미다.
지난 4월 22일 기준 신한 레버리지 ETN의 지표가치 값은 74.6이다. 반면, 시장가격인 종가는 650원으로 괴리율은 무려 771%에 달했다. 급기야 한국거래소는 “기초자산인 WTI 원유 선물이 50% 이상 하락해 지표가치가 ‘0’원이 되면 투자금을 전액 손실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ETN 제값 청산 가능성 ‘제로’
▷3000억원대 손실 추정
결론적으로 국제유가 ETN이 제값에 정리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신한 레버리지 ETN의 경우 유가가 단기간에 급등해 지표가치가 2배로 뛰더라도(74.6×2=149.2) 현재 시장가격인 650원에는 한참 못 미친다. 국제 원유 선물 시세가 여기서 더 추락하고 지표가치가 ‘0’에 수렴하면 국내 ETN은 휴지 조각으로 전락한다. 지표가격이 0으로 곤두박질치면 앞으로 국제유가 시세가 100배 급등하더라도 ‘0×100=0’, 즉 지표가치는 제로에서 변하지 않는다. 지표가치가 1로 떨어지더라도 마찬가지다. 매일 유가가 2배씩 폭등한다는 불가능한 가정을 해도 1 → 2 → 4 → 8 → 16 등으로 현 시장가격을 따라잡을 수 없다.
현시점에서 원유 레버리지 ETN 투자자들의 잠정 손실액은 어느 정도일까. 4월 22일 기준 원유 레버리지 ETN의 잠정 손실액은 4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 레버리지 ETN 총 4개 상품의 시가총액은 4344억원, 지표가치 합계는 384억원이다. 이들 4개 종목이 상장폐지 또는 조기청산 절차에 돌입한다고 가정하면 투자자들은 지표가치 금액만을 돌려받게 된다. 결국 투자자들은 전체 시가총액에서 지표가치 금액을 제외한 약 3960억원(4344억-384억원)의 손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존버’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ETN의 수익은 기초자산의 시세차익에서 롤오버 비용을 제한 것이 된다. 투자 기간이 길어질수록 ‘슈퍼 콘탱고’에서 초래된 롤오버 비용이 수익을 잠식하는 영향이 커진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개인투자자들이 ‘콘탱고’ ‘롤오버’ ‘지표가치’ 등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른 채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시장가격만 잔뜩 올려놨다. 유동성을 공급하는 증권사는 속수무책이었다. 국내 증권사는 지표가치 가격의 6% 범위 내에서만 호가를 낼 수 있다. 신한 ETN을 예로 들면 지난 4월 22일 종가는 650원으로 하한가를 가정해도 360원대다. 반면, 증권사가 낼 수 있는 최저 호가는 60원 초중반대다. 도저히 거래가 이뤄질 수 없는 구조다. 파생 시장 관계자는 “레버리지 ETN은 지금이라도 손절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 정도 괴리율의 ETN 가치는 측정이 무의미하다. 그나마 팔 수 있을 때 헐값에라도 팔아야 한다. 헛된 희망은 금물이다”라고 지적했다.
[배준희 기자 bjh0413@mk.co.kr, 노승욱 기자 inye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56호 (2020.04.29~05.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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